쓰던 걸 내던져두고 오늘의 일기... 왜일까여. 나는 시방 잠의 노예라 그렇습니다.
꿈에서 나는 “마루”를 잃었다. 꿈속에서의 마루는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마루를 놓치고서 이제 어디에도 없는 마루에 대한 죄책감과 상실감을 어떻게 하지 못해 홀로 동네를 헤매고 있었다. 왜 헤매는지는 나로서도 알 수 없었다. 마루를 어디서도 찾을 수 없을 것이란 걸 이미 알고 있었는데도 왜 여기저기를 들쑤시고 다녔던 것일까? 찾고 있던 것은 마루일까, 마루를 잃은 마음의 구멍을 채울 무언가였을까? 높은 언덕배기에 빼곡이 들어찬 작고 오래된 단독주택들 사이에서,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전화를 걸며 헤매고 있었던 것을 보면 어쩌면 후자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나는 번화가인 언덕 아래 근처까지 내려왔지만 다시 언덕길을 올라갔다. 쓸쓸함과 죄책감이 마음을 짓누르고 나는 눈을 떴다.
잠에서 깨어나선 왜 새삼스럽게 3개월이나 전에 죽은 마루의 죽음직후를 꿈꿨던 것인지 잠깐 생각해본다. 어째서 마루가 죽는 순간이 아닌 마루가 죽은 직후인지, 왜 낯선 언덕배기여야만 했는지 잠깐 의문을 품었다. 의문을 품기만 했다. 답을 고찰해볼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바로 욕실 문을 들어가 샤워기를 틀었다. 따뜻한 물이 나올 때까지 방에서 수건을 가지고 나온다.
일어나서 씻기 시작하자 이번엔 일에 대한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후임으로 들어온 직원의 성실함을 보며 내가 잘못한 것인지 아닌지를 생각한다. 어차피 영업일 기준으로 5일 후엔 그만둘 건데 아직도 끈질기게 내가 어떻게 남은 기간을 버텨야 할지를 생각한다. 다른 직원들의 태도나 나의 실수들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큰일은 아니지만 끈질기게 사고의 한구석을 잠식하고 있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스트레스였다. 손바닥에 좁쌀처럼 오톨도톨하게 수포들이 난 것도 스트레스 때문일 터였다. 빨리, 빨리 그만두고 싶었다. 오늘은 수요일, 다음주 화요일까지만 일하면 되니 이제 딱 일주일 남았다. 요 2주간 내내 날짜만 세며 버티고 있었다. 병원 외래 보조는 생각보다도 훨씬 정신력을 소모하는 일이었다.
출근해서 들어가는 길에, 아직 진료 시작하려면 30분은 남았건만 벌써 와서 대기하고 있는 환자가 보인다. 머리가 하얗고 연세가 지긋하지만 젠틀한 할머니였다. 할머니 한 명밖에 없다니 수요일 치고는 대단한 이변이다. 어제는 다섯 명이 앉아 있었고 월요일엔 여덟 명쯤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컴퓨터를 켜고 전산을 켜고 종이를 쑤셔넣는다. 후임은 아침 일찍 와서 프린터에 종이 넣는 것도 컴퓨터 켜는 것도 전산 켜는 것도 하지 않고 처치실에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남는 시간동안 뭘 하는 걸까? 아무래도 괜찮다. 내가 나가면 어차피 후임이 알아서 다 해야 할 일이다. 나라고 처음부터 그런 것들을 다 하고 있었던가?
그리고 수요일이다. 여기는 월요일과 수요일 오전이 고역이다. 총 다섯 개 있는 방이 모두 활짝 열린다. 4번방은 흉부외과로 예약 환자의 숫자가 적으며 응급 수술이 잡히는 경우가 많아 크게 손이 가는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은근히 신경이 쓰인다. 심장내과 사이에 흉부외과를 집어넣은 이유는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고혈압과 부정맥 환자들 사이에서 기흉과 갈비뼈 골절 환자들이 들락날락 하며 가끔 접수직원의 실수로 심장내과를 찾아와야 할 사람이 흉부외과로, 흉부외과로 가야 할 사람이 심장내과로 오기로 한다. 발음상의 이유로 신장내과를 가야 할 사람이 심장내과로 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쨌거나 그러한 연유로 북적거려야 할 수요일 첫 타임이 한산하다. 뒤에 선 베테랑 선생님은 이러다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게 아니냐며 불안해 한다.
왜 나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환자들은 한꺼번에 들이닥치기 시작했고, 우리는 계속해서 환자를 검사실로 보내거나 안내문을 줘서 자리에 앉아있게 하거나 계속해서 울려대는 전화를 받거나 하며 신경을 좀먹었다. 애초에 오늘의 고생을 예상하고 아침부터 커피믹스 두 개를 타 마신 터였지만 머리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옆자리엔 새로 뽑힌 후임이 앉아 있는데, 아무리 성실하고 똑똑해도 이제 일주일 된 후임이 뭘 할 줄 알겠는가. 교육 담당차 앉아있던 직원이 가르쳐주고 휠체어에 탄 환자들 혈압 재러-기본적으로 혈압을 재고 진료에 들어가는데, 거동이 불편한 환자의 경우 외래보조가 혈압기를 들고 가서 직접 혈압을 재어준다- 내가 메뚜기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 같이 환자를 받아준다 하더라도, 이렇게 환자가 많을 때면 과부하가 걸리는 걸 피할 수가 없었다.
이상한 환자들도 많다. 정말 많다. 예를 들어 오늘의 경우, 예약시간보다 한 시간쯤 일찍 왔길래 다른 과 좀 보고 오시라고 예약된 다른 과에 보냈더니, 다시 돌아오고선 혈압도 재지 않고 다짜고짜 자신이 왜 더 기다려야 하냐며 성질을 내는 것이다. 그새끼는 우리 과에서 단 5분도 기다리지 않았다. 그저 예약된 다른 과의 볼일을 보고 끝내고 왔음에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이 날 뿐이었다. 그렇게 볼일을 보고 와서도 아직 예약시간까지 25분이 더 남아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님 예약시간이 아직 한참 남으셨잖아요. 앞시간대 예약자분들이 먼저 들어가고 있고 스케줄 따라 돌아가고 있는 겁니다 안내했더니 “그럼 예약시간 되면 곧바로 들여보내줘요? 안 들여보내주잖아 왜 당장 안 들여보내주는 건데!!” 하며 화를 낸 중년 남성이 있었다. 그런 식으로 화를 내는 건 보통 중년 남성들이긴 하다. 대기를 설명했을 때 받아들이지 못하고 화를 내는 사람은 대략 70%의 확률로 중년 이상 연령대의 남성이고 20%의 확률로 젊은 남성이며 10%의 확률로 여성이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나도 잘 알 수가 없다. 대강 세상이 자신의 예상대로 굴러가야만 하는데 자신이 계획한 것에서 상황이 벗어나면 받아들이기 힘들고 화나고 짜증나서 앞에 앉아 있는 만만한 여자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이런 쪽에서 서비스업을 하다 보면 남성 전반에 대한 불신이 무럭무럭 자라게 된다. 자주 환자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성희롱이나 평가도 그렇다. 냄새도 그렇다. 과연 여성으로서 성차별이 어떤 것인지 깊이 체감하고 싶다면 병원 외래 일을 해볼 것을 권한다. 남성 전반에 대한 깊은 분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오늘 오전 스케줄을 끝내고 느낀 것은 이것이었다. “퇴직에 대한 기대와 기쁨으로 현재의 스트레스를 감경하기엔 이제 약발이 다 떨어졌다!” 사실 요 2주간 그 기쁨으로 살아왔고, 어제까지만 해도 그런 기쁨이 상당히 크게 작용했다. 그래서 힘든 것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이제 약발이 떨어졌다. 펜션을 이미 예약해버려서일 수도 있다. 강원도의 바다는 가기도 전부터 색이 바래버리고 말았다.
힘들었다. 오늘 저녁엔 스터디 마감도 해야 한다는 사실도 힘들었다. 심지어 5번 방의 성격이 개같기로 소문난 서교수가 환자 한 명당 5분 만에 봐야 할 스케줄임에도 한 명당 거의 10~15분을 들여 보게 되어 예약 환자들까지도 한 시간 이상 기다려야 했기 때문에 더욱 힘들었다. 환자들은 지쳐갔고 우리도 지쳐갔다. 환자들은 내내 왜 이전 환자가 안 나오느냐고 푸념을 했고, 나는 전산 화면을 볼 때마다 아직도 이 환자를 보고 있는가 싶어 깜짝 놀라곤 했다. 재활의학과 선생이 대기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올려놨고 순서가 되면 전화를 해달라 했지만, 퇴근 시간이 된 5시 반까지 그 선생의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행히도 내 담당이 아니라 나는 먼저 퇴근했지만, 퇴근도 못 하고 환자들 푸념을 받아내야만 했던 담당 선생은 대체 무슨 죄인가? 나와 동갑이고 경력도 이미 어느 정도 쌓인 교수임에도 어째서 그만큼이나 시간이 걸려야만 하는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물론 환자를 꼼꼼하게 봐주면 좋긴 하지만 그만큼 대기하는 환자의 괴로움도 커진다. 실적을 포기하고 서교수의 희망대로 10분 단위로 예약을 받고 소수의 사람들을 상담해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과장의 지시와 병원 방침 때문에 그 희망은 이루어질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건 또 안타까운 일이긴 했다.
퇴근하면서는 친구와 통화를 했다. 친구는 이직이 아닌 전직을 하기 위해 퇴직했다. 이 나이에 전직이라니! 나는 그보다 더 심한 무경력자면서 그런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친구의 전직을 마음속으로 굉장히 응원하게 되었다. 전직, 새로운 경력, 새로운 시작, 여러 구인광고를 보며 나이제한에 좌절했던 나로서는 그 친구가 꼭 성공하길 기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도. 그랬다. 나도. 나도 어떤 것이든 성공하게 되길 기원했다. 하지만 무엇으로? 그건 나도 알 수 없었다. 아침의 꾸은 어쩌면 이런 마음의 대변일지도 몰랐다. 고된 언덕배기, 오래된 단독주택들, 그 낯선 곳에서 하염없이 헤매었던 것은 마루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나 때문일지도 몰랐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이따금 출근하면서 마루 생각에 눈물을 흘렸던 것은 정말로 마루가 가엾어서였던 걸까, 아니면 비극적인 결말에 사로잡힌 내가 가엾어서였던 걸까? 마루의 안락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풀타임으로 취업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출근한 첫날 마루를 떠나보낸 불쌍한 나! 나는 같잖고 흔한 최루성 사연의 주인공이 나란 사실에 눈물을 흘리고 있단 사실을 종종 자각했다. 바보같은 일이었다. 마루는 내게 무엇이었을까?
신경이 찢어질 것 같은 나날 사이에서 그런 생각을 한다. 일이란 멀까. 마루는 뭘까. 나란 인간은 뭘까. 인생사 정말 재미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