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동안 믿어왔던, 그러나 감히 보거나 느낄 수 없었던 존재의 증명이 눈앞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분명 자신에 의해 격발된 이 증명을 그는 믿을 수 없었다. 마치 신의 사자를 창으로 찌른 병사처럼 기적을 행하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아니, 분명 기적을 행하는 것은 그 손이 아니었다. 그가 단단히 단련한 손을 옆구리 깊숙이 찔러넣어 고통스러워하는 상대방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신이 상대를 선택했다는 증명이자 기적이었다.
“당신이 그런 표정을 하는 건 처음 보네요. 악마를 미워하는 데 겨워 감정도 잃어버린 줄 알았더니.”
고통스러운 숨을 몰아쉬며 말하는 그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는 푸른색이었다. 흘러내린 금발의 고수머리가 이마에 들러붙었다.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 아래엔 라틴어를 빽빽히 새긴 문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라틴어는 산산이 부서져 그의 땀에 섞여들어갔다. 땀방울이 흘러내린 자리에 깨끗한 흔적이 남고 검은 땀방울은 바닥과 부딪쳐 강렬한 빛을 발하다가 곧 사라졌다.
검은 수단을 입고 금발 청소년의 옆구리에 수도를 찔러넣은 남자는 그의 애달픈 호흡과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투명한 체액을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동양인 혼혈 특유의 어두운 갈색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성흔은 여러 사람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곤 했지만, 이건 잘못된 것이었다. 잘못된 대상이었다. 결코 일어나선 안 되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신은 틀리지 않는다. 그의 안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순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것은 악마가 신의 흉내를 내는 것인가? 아니면 신이 기적을 행하심인가?
남자는 갈비뼈 아래로 찔러넣은 손을 빼냈다. 투명한 체액이 피처럼 쏟아졌고 금발의 아이는 옆구리를 잡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검은 머리의 남자는 소년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했다. 그의 손에 묻은 것이 농도 짙은 성수와 같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왜 악마의 몸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검은 옷을 입은 소년 무리들이 구덩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얼굴 반쪽에 빽빽히 라틴어 문신을 새기고 있었다. 머리는 모두 짧게 잘라 단정하게 넘겼다. 얼굴도 머리색도 키도 체격도 모두 달랐지만 모두 비슷비슷해 보였다. 그들은 침묵하며 침음한 얼굴로 구덩이 안을 바라봤다. 구덩이 안에는 관이 하나 들어있었다.
저쪽에서 수단을 입은 남자 둘이 수레를 끌고 왔다. 거기엔 매끈하게 마감처리된 거대한 십자가가 들어있었다. 옆면엔 세련된 필체로 세긴 글귀들이 적혀 있었고, 정면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소년들 사이에 있던 성인 남자 둘과 수레를 끌고 온 성인 남자 둘이 그 십자가를 들어올렸다. 무거운지 끙 소리가 났다.
그들은 십자가를 관 위에 올려놓았다. 관보다 50cm는 더 큰 십자가였지만 그들은 신경쓰지 않았다. 관의 머리맡에 있던 수단을 입은 남자는 흙을 뿌리면서 라틴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나머지 수단을 입은 성인 남자들이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관 위로 흙이 덮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흙이 쌓이자 남자들은 소년들에게 삽을 쥐어줬고, 소년들이 무덤을 마무리했다. 묘비는 없었다.
파울로스는 그 광경을 무감각하게 바라보았다. 이곳에 온 후로 사람을 묻는 일은 이제 겨우 두 번째였지만 그 전에 그는 숱하게 많은 사람들을 묻어왔었다. 이런 일은 이제 익숙해졌다. 누군가의 죽음에 익숙해지는 사제란 게 윤리적으로 괜찮은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에게 누군가의 죽음이란 언제나 있어왔던 것이고 앞으로도 항상 있을 예정이었으므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모든 생명은 죽는다라는 당연한 사실과 명제가 수호부처럼 그를 지켜주고 있었다. 다만 신경쓰이는 것이 있을 뿐이었다. 그 신경쓰이는 것은 검은 옷을 입고 금발로 뒤덮인 작은 머리통을 흔들며 자기 동료의 무덤에 흙을 덮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아직 앳된 티가 나는 선이 고운 얼굴엔 혼란과 울분이 어려 있었다. 수업 시간엔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파울로스는 고개를 돌렸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모래색 건물들이 보였다. 지중해의 따가운 태양이 건물에 부딪쳐 눈을 자극했다. 뒤로 보이는 바다는 더욱 적극적으로 태양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담벼락 아래로 돌렸다. 정갈하게 정돈된 나무들이 눈을 시원하게 해줬다.
이곳은 수도원이자 일종의 학교였다. 교단에서 ‘절대로 세속에 방치해선 안 되는 아이들’을 거둬 키우며 교육시키는 곳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고아원과도 같은 곳이었는데, 일반 고아원과 다른 점이 있다면, 보호자가 없어서 고아원으로 수용이 되는 게 아니라 교단이 적극적으로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어 데려온다는 점일 것이었다. 아이들은 인간과 악마의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로 태어났고, 교단은 악마와, 악마와 교접한 용서받을 수 없는 인간을 처리하고 남은 부속물이었다. 인간으로 볼 수도, 악마라고 볼 수도 없었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오거나, 울부짖거나, 자신의 권리를 따지고 들었지만, 곧 이곳에 익숙해졌다. 보수주의자들은 아이들이 주제도 모르는 작은 악마들이라고 했다. 불과 30년 전까지는 아이들까지 모두 죽여왔으니 어떤 의미 운이 좋은 아이들이란 표현도 종종 간부의 입에서 튀어나오기도 했다.
파울로스 본인에게는 그 아이들을 감독하고 가르치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그 아이들에 대한 판단은 보류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어떤 때는 인간으로 보였고 어떤 때는 악마로 보였다. 아이들이 악마가 되지 않도록, 악의 길로 접어들지 않도록 엄격하게 지도하는 것만이 길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교단 전체의 입장이기도 했다. 끝없이 금욕과 근면과 인내와 희생을 강요했다. 그들이 탐욕과 나태와 이기심에 들어가는 것은 보통의 사람들과 달리 악마의 기질이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본인들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순수한 인간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음욕을 탐하게 되고 신의 가르침을 배신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존재 자체가 악이었다.
파울로스는 한숨인지 아닌지 모를 것을 내쉬었다. 시선이 가 닿은 담장 아래엔 작은 무덤이 하나 있었다. 고양이의 무덤이었다. 만든 이는 무덤의 흙을 다지고 있는 금발의 소년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다지기가 끝났는지 검은 옷의 소년들은 각자 돌아가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돌아가는 모습들 사이에서 요한은 무덤 위에 서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얼굴로 땅을 내려다봤다. 그리고는 고이 덮인 흙 위에 삽을 내리꽂았다. 단호한 행동에 그의 옷자락이 펄럭였다. 긴 속눈썹을 내리깐 깨끗하고 아름다운 그의 반쪽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강단이 어렸다. 파울로스는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요한은 흘끗 마주보고는 등을 돌려 다른 소년들이 간 방향으로 함께 사라졌다.
“자살 사건을 이대로 묻을 수는 없잖습니까! 상부에 알리고 합당한 처리를 해야 합니다. 외부에 알리지 않더라도 적어도 교단 내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치해야죠!”
수단을 입은 한 남자가 말했다.
“상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벌써 두 번째라는 것도요.”
수단을 입은 다른남자가 말했다. 식탁에 둘러앉은 검은 수단을 입은 남자 사제들은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저녁을 넘어 밤의 초입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가 악마의 유혹에 유독 취약하다는 것이 그를 벌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잊지 마세요, 우리가 돌보고 있는 저 아이들은 악마의 아이들입니다.”
“유혹이라고요? 아이가 유인을 했다면 자살까지 했겠습니까? 이건 명백한 강간사건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자살사건까지 일어난 것이고요!”
“그렇다는 증거가 어디있습니까? 마성이 인간성을 누르고 그를 유혹했다가 나중에 제정신이 돌아온 아이가 자신을 못 견디고 자살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혹은 그저 자신이 순결한 희생자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자살을 했을지도 모르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계속 아이를 두둔하던 사제가 테이블을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주름 하나 없는 그의 이마에 새파란 혈관이 돋아났다. 분노로 꽉 쥔 주먹이 떨렸지만 테이블에 앉은 나머지 사제들은 별다른 미동이 없었다.
“지극히 인간적인 정의감에서 하는 말인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형제님, 저 아이들은 악마의 자식들입니다. 보통 인간처럼 생각해선 안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반백의 중년 사제가 조용히 말했다. 홀로 일어서 있던 사제는 파르르 떨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남은 사제들의 시선이 그 사제의 뒤를 따르다 문이 닫히자 다시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제 서로의 얼굴로 향했다. 그들은 서로를 둘러본 후 테이블 위로 조용히 가라앉았다.
“형제님은 악마의 유혹에 이끌려 결코 사제가 행해선 안 될 음행을 했으나,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행동을 반성하고 있으므로 정상을 참작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 또한 나약한 인간이니 그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침투하기 쉬운지 알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형제님들은 부디 악마에 홀려 죄를 지어버린 나약한 형제님을 너무 몰아세우지 맙시다. 우리의 근원은 사랑이고 평등입니다. 나약한 인간은 주님 앞에 모두 죄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인간의 죄를 사하고 악마를 억누르고 주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입니다.”
반백의 사제가 말하자 다른 사제들은 성호를 그었다. 아멘, 기도하는 자의 목소리도 있었다. 모든 것을 관망하듯 바라보던 파울로스는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자는 말을 길게도 하는군.’ 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얌전히 기도에 동참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들 사이에서 밉보여 좋을 게 없었다. 그리고 그 역시 똑같은 판단을 내렸을 터였다. 미천한 인간으로서 그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선조의 지혜에 따라 관례에 따르고 상부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그로서는 실수를 최소화하는 길이자 인간으로서 죄를 최대한 덜 짓는 길이었다. 혹 부조리하단 생각이 들더라도 조직 안에 속한 그가 감히 조직의 판단에 반기를 들어봤자 변화는 없을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모든 인간사가 그렇듯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혹은 다수의 뜻대로.
회의를 마친 사제들은 하나둘씩 방을 떠나기 시작했다. 각자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것이리라. 그들은 돌아가서 기도를 하고, 그리고 조금 찜찜한 기분을 곱씹다가 금방 곯아떨어질 것이었다. 늘 그래왔듯이.
파울로스 역시 자신의 방으로 향하려다 내키지 않아 건물 밖으로 나왔다. 쌀쌀한 밤공기가 갑작스레 폐부로 침입해 기침이 났다. 그는 근육질인 체형에 어울리지 않게 잔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오늘 묻은 아이의 무덤을 향해 걸었다. 죄책감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뭔가 가슴을 간질이는 것이 있어 발길을 그곳으로 돌린 것이다.
그곳엔 선객이 있었다. 검은 그림자만 보고도 파울로스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요한이었다. 그는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철제 삽이 흙에 마찰하는 소리가 나고 흙이 뒤로 뿌려지는 소리가 났다. 파울로스는 더 다가가지 않고 요한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미 상당히 팠는지 허리 아래로는 보이지가 않았다. 옆엔 파낸 흙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혼자서 하려면 힘들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도울 생각도 제지할 생각도 없이 숨죽여 요한을 지켜보았다. 요한은 마치 홀린 듯, 아니, 집념에 사로잡힌 듯 쉬지않고 구멍을 팠다. 허리를 펴거나 땀을 닦는 행동조차도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그저 삽질을 계속할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가 되어 허리를 펼 때까지 파울로스는 그를 관찰했다. 구덩이의 깊이가 요한의 키를 넘겼을 때는 심지어 무덤가에 다가가 위에서 노골적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재밌어?”
이윽고 허리를 펴고 한숨 돌린 요한이 묻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왜 그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반인반마인 소년이 하는 행동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덤 속에서 끙 소리를 내며 요한이 십자가의 한쪽을 들어올렸다. 파울로스로부터 먼 쪽, 관의 발치 부분에서 들었으니 결과적으로 역십자 모양이 되었지만 개의치 않고 구덩이 벽면에 십자가를 세워뒀다. 그는 십자가의 모습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며 요한이 세운 십자가의 끄트머리를 잡았다.
끙차, 소리를 내자 십자가가 끌려 올라왔다. 구덩이에서 올라온 십자가의 흙을 털어 조심스럽게 바닥에 놓자 요한도 가벼운 몸놀림으로 밖으로 올라왔다.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것이 마치 고양이 같았다.
“......”
올라온 요한이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상대의 도움에 놀랐기 때문이었을 터였다. 다만, 그것만이라고 하기엔 시선이 좀 묘했다. 파울로스는 약간 불편함을 느끼며 구덩이를 내려다봤다.
“노래 하나를 받았는데” 게임연구부실에서 나츠메가 말했다. 츠무기는 소라가 하던 게임 화면을 바라보는 것을 멈추고 나츠메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먼저 선배의 부모님께 보여주고 싶어.” “나츠메 군?” 츠무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츠메의 의도를 읽기가 힘들었다. 부모님께 공연을 보여줄 거라면 공연 날짜가 잡혔을 때 그곳으로 부모님을 부르면 될 일이었다. 츠무기의 부모뿐만 아니라 나츠메의 부모, 소라의 부모까지 모두 불러 당신의 아들들이 얼마나 아이돌로서 성장했는지를 보여드리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그런 의미는 아닌 듯했다. “싫든 좋든 선배와 같은 유닛이 되어버렸잖아. 공연 중 선배네 부모님 문제로 누가 무대에 뛰어들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대참사야. 팬들에게도 멤버 중 한 명의 집이 빚더미에 올라앉아 있다는 걸 알려서 좋을 게 없어.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고, 그들이 빚을 대신 갚아주겠다며 모금이라도 하면 어쩔 거야.” “네에, 그건 나도 있어선 안 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집은 이제 빚이 없는걸요.” 츠무기의 의문을 표하는 말에 나츠메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 황제 폐하가 선배를 버리면서 빚을 대신 탕감해줬지.” “하하, 사실이긴 하지만 버렸다는 표현은 좀 그렇네요. 에이치군이 나쁜 사람 같잖아요... 으앗! 으... 나츠메 군?!” 나츠메가 츠무기의 옆구리를 때렸다. 츠무기는 맞은 부위를 손으로 감싸곤 나츠메의 얼굴을 쳐다봤다. 불쾌함을 넘어 약간의 분노마저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내 앞에서 그녀석을 두둔하지 마!” 츠무기는 약간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하하 어쩔 수 없네요. 그는 그렇게 말하곤 다시 나츠메의 얼굴을 응시했다. 나츠메는 그 평화로워 보이는 얼굴에 불만을 쏟아내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옆에 앉은 소라를 의식해서였다. 소라는 아직 어린애나 마찬가지였다. 험한 말을 들어서 좋을 이유가 없었다. 선배의 옆구리에 리버블로를 먹이는 장면을 보이는 건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쁜 버릇은 쉽게 사라지지 않아. 선배의 어머님이 또 빚을 무지막지 쌓기 시작해 다시 빚더미에 오르면 어쩔 거야? 그러니 그 전에, 무슨 수를 내지 않으면 안 돼.” “하하... 부정할 수 없는 말이지만, 아무리 어머니라도 일 년 만에 빚쟁이들이 찾아와 행패를 부릴 만큼 빚을 쌓진 않을 거예요. 맞벌이 가정이기도 하고요.” 츠무기의 말에 나츠메는 또다시 울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그는 최근 츠무기에게 거절당하는 것에 쉽게 분노를 느꼈다. 츠무기가 에이치에게서 결코 작지 않은 도움을 받은 전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츠메를 거부하는 것이 아닌 자신이 버텨야 할 영역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힘들었다. 어렸을 때의 인연도 있었고 여기 학원에서 만나 알고 지낸 기간은 에이치와 츠무기가 알고 지낸 기간과 불과 5개월도 차이가 나지 않았다. 매일같이 지하서고로 내려와 자신과 대화를 나눴고 정을 쌓았다. 적어도 나츠메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도 이 차이는 뭔가? 츠무기와 에이치가 자신을 포함한 오기인을 교내에서 고립시키고 오명을 씌워 비난받게 만드는 동안 자신은 츠무기를 형이라 부르며 그를 따랐었는데도 그는 ‘필요한 일이었을 뿐이다’라며 자세한 내막은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와타루에게 ‘상당기간 동안 그는 내막을 모른 채 에이치의 계획을 수행했던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었다. 츠무기는 변명하지 않았다. 어디까지가 자신의 잘못이고 어디까지가 이용당한 것인지 말하지 않았다. 그저 ’한 행동에 대한 속죄를 하겠다. 무엇이든 받아들이겠다‘라고만 했다. 결국 텐쇼인 에이치를 향해야 할 몫의 분노까지 자신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말 그대로 에이치에게 던질 돌을 자신이 막아서서 대신 맞아주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나츠메에게는 유닛을 위해서라고 말하며 도움을 주겠다는 데도 사양이나 하고 있었다. 누구처럼 막대한 금액의 빚을 변재해주는 것도 아닌데도, 그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주겠다는데도. 에이치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긍정해놓고선 나츠메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나츠메는 그것을 버티기가 힘들었다. “그런 일이 생길지 아닐지 어떻게 알아? 선배 주제에 건방지네. 일단 끝까지 들어.” “네! 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건 양육자의 의무죠! 얼마든지 얘기해주세요!” 나츠메는 다시 츠무기의 보디를 때렸다. 츠무기는 때린 곳을 정확히 다시 때렸다며 나츠메의 기술을 칭찬했다. 나츠메는 이마를 짚었다. “애 취급 하지마. 이야기가 진전이 안 되잖아. 그보다도, 그래서 선배네 집에 찾아가서 어머님과 아버님을 앞에 두고 이 곡을 불렀으면 해. 선배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우리 마미의 이름을 이용해서라도 앞으로 가급적이면 선배를 믿고 낭비를 줄여서 생계 곤란 지경까지 빠지지 않도록 설득하는 거야.” “헤에...” “그래서, 곡의 가사는 선배가 써줬으면 좋겠어.” 나츠메가 악보를 건네줬다. 츠무기는 웃었다. 소용없을 거라 생각했다. 나츠메는 절대 이해할 수 없을 일이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에이치가 거액의 빚을 갚아줬을 때도 자신에게 미소 한 번 지어주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 이후로 어머니와 얼굴을 마주하는 횟수는 이전보다 줄었으면 줄었지 늘지는 않았다. 에이치조차도 자신을 끼고서는 불가능했던 일이었다. 애당초 원인은 자신의 존재 자체였으므로 스스로 사라지지 않는 한 어머니는 계속 그 상태일 것이었다. 물론 지금 상태가 좋다거나 손 놓고 있는 게 최선일 리는 없었다. 그의 뜻에 따라 어머니를 설득해 본다 해서 딱히 손해날 것도 없었다. 하지만 또다시 실패를 목격하는 건 역시 심정적으로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haha~ 선배네 집에 우리가 행복의 마법을 거는 건가요? 소라는 대찬성입니다~!” 스테이지가 끝났는지 소라가 뒤로 돌아보며 말했다. 천진한 목소리였다. 나츠메는 애정을 듬뿍 담은 손길로 소라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소라. 행복한 존재는 중독되지 않아. 마약에도, 알콜에도, 폭력에도, 점괘에도, 종교에도 말야. 소라의 말이 정답일지도. 더구나 행복의 마법은 우리 유닛의 캐치프레이즈이자 특기이기도 하니까. 소라는 똑똑하구나.” 츠무기는 그들을 바라봤다.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애정을 담은 눈빛은 곧 녹을 것처럼 달콤해 보였다. 자신이 에이치를 바라볼 때도 저런 눈빛을 했을까 하는 어렴풋한 의문을 품었다. 하지만 자신이 어떤 시선과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는지 스스로는 알 수 없었다. 츠무기는 미소지었다. 어차피 자신은 더이상 상처받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들을 위해 굽혀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선량하고 상냥한 사람이었다. 결코 나츠메와 소라 앞에서 매몰차게 굴진 않을 것이었다. 거절은 모두가 떠난 뒤에 혼자 맞아들이는 걸로 충분했다. “제가 가족에게, 주로 어머니께 할 말을 정제해서 써 달란 얘기죠?” 츠무기는 악보를 받아 들었다. 나츠메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츠무기를 올려다 보았다. “임시로 쓸 가사니까 좀 미숙해도 괜찮아. 하지만 어머님을 확실히 감동시킬 내용으로 부탁해.” “하하, 어렵네요. 알겠어요.” 츠무기는 고개를 끄덕이고 부실을 나섰다. 어차피 실패할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충 하는 것은 성정에 맞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자신을 받아들여 달라는 건 무리한 부탁일지도 몰랐다. 행복해달라 부탁하는 것조차도 그럴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해도 분명히 자신이 어머니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을지도 몰랐다. 사랑이든 무엇이든, 어머니를 지금보다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어떤 이야기를 자신은 찾아야만 했다.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거나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얻게 만들 수 있는 이야기라면 불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지금보다 조금은 고통을 더는 이야기라면 자신이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파릇파릇하니 신록이 돋아나는 봄날의 저녁, 그들은 츠무기의 집 거실에 나란히 섰다. 눈앞엔 츠무기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앉아 있었다. 배다른 형은 사정이 있어 오지 못 했다. 츠무기가 가볍게 어깨를 떨자 소라가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둘은 서로 시선을 맞추고 웃었다. 부를 노래는 아카펠라로 편곡된 노래였다. 무대가 가정집 거실이란 것을 감안해 안무는 최소화하고 가창에 집중하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연습을 하는 동안 츠무기는 즐거웠다. 자신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는 사람과 함께하는 경험은 조금 특별한 것 같았다. 아마도 행복했을 것이다. 츠무기는 어머니께 그런 행복을 나눠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머님, 아버님, 한 곡뿐이지만 잘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특히 어머님께는, 이 곡의 가사는 선배가 혼자서 직접 썼다는 걸 염두에 두고 들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곡으로 아드님인 츠무기 선배의 가능성을, 그리고 우리 Switch의 가능성을 보실 수 있으면 좋겠네요.” 나츠메가 말하며 신사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츠무기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박수를 치며 그의 멘트를 환대했다. 츠무기는 미소지었다. 어머니는 비록 나츠메의 이름을 듣고 나서야 일찍 집으로 와 공연을 보게 되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녀가 자신을 용서하건 아니건 가사를 적으면서 그는 전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그 말을 그녀가 들어주길 바랐다. 스피커로 피아노의 선율이 흘렀다. 제일 먼저 츠무기의 솔로 파트였다. 그리고 소라와 나츠메가 화음으로 그를 보조했다. 노래는 아름답게 이어졌다. 마치 부드러운 천이 직조되는 것처럼. 츠무기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마음을 담아 노래를 불렀다.
당신의 마음을 알고 있어요 우리는 같은 상처를 갖고 있죠 긴 밤도 상처를 살피는 데 부족했어요 우리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죠 하지만 왜 죄 지은 마음이 드는 걸까요 누구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까요 어떻게 속죄해야 하는 걸까요 모르는 건 우리가 잘못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모르는 건 우리가 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잘못해서 생긴 일이 아니에요 우리가 잘못해서 생긴 일이 아니에요 우리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죠 누구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까요 어떻게 속죄해야 하는 걸까요 모르는 건 우리가 잘못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모르는 건 우리가 죄인이 아니었기 때문이에요 그래도 용서를 구한다면 내가 용서할게요 무죄의 증인을 구한다면 내가 되어줄게요 당신은 행복해질 자격이 있어요 당신의 행복을 기도할게요 당신을 사랑해요
노래를 들으며 츠무기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어깨를 안고 츠무기에게 반짝이는 눈빛을 보냈다. 아마도 성장한 자식의 모습에 감격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였다. 그녀는 점점 눈물을 더 흘렸다. 그녀는 자신을 부르던 어린 츠무기의 모습을 떠올렸다. 아주 어렸을 때, 자신이 죽이려고 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애정을 갈구하던 그 모습이, 자신을 부르던 그 모습들이 마치 이어붙인 것처럼 연속적으로 떠올랐다. 그는 늘 어딘가 어수룩하고 외로워했다. 그건 자신이 제대로 돌봐주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녀는 아이가 남편에게 억눌려 자신을 바라보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모든 것들을 그녀는 외면했다. 외면해왔다. 자신은 같은 상처를 가졌기에 외면했는데, 그는 같은 상처를 가졌기에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았던, 누구가에게 보여줄 수조차 없었던 그것을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보듬어주고 있었다. 그녀는 감정이 북받쳐 오열했다. 그녀의 인생은 속죄와 자기혐오와 자기방어로 이어져 있었다. 도대체 누구에게 무엇을 속죄해야 할지 몰랐지만, 끊임없이 속죄를 이어왔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더럽혀진 것에 대한 속죄, 가족에게 강간당한 것에 대한 속죄였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그런 행동을 한 것에 자신이 빌미를 제공했다는 끊임없는 의심에 대한 속죄였다. 그것을 자신과 똑같은 경험을 한 아들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준 것이다. 자신의 불행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징벌이란 생각을, 두려움을 갖고 있었던 것에 죄가 없다고 말해준 것이다. 그녀는 서러움을 토하듯 울었다. 츠무기는 그녀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 정말 기대하지도 않았던 반응이었다. 언제나 자신은어머니에게 무가치한 존재거나 괴롭히고 해로운 존재이지 않았던가? 그는 조금 더 자신의 말을 건네기로 했다. 그녀가 다시 마음을 닫기 전에 말을 해둬야만 했다. “엄마, 저는 그때 엄마가 모른 척했던 건 원망하지 않아요.” 츠무기가 다가와 내민 손을 그녀가 맞잡았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들고 그녀는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어떻게... 어떻게... 나는 널 외면했는데...!” “아뇨, 잘못은 아버지에게 있죠. 날 강간한 건 아버지예요. 어머니는 그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거라 생각해요.” 츠무기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꺼냈다. 말투는 지독히도 다정했지만 그 내용에 뒤에 서 있던 나츠메는 크게 움찔거렸다. “나를 볼 때마다 어머니는 괴로웠을 거라 생각해요. 외할아버지... 아버지가 생각났겠죠. 당장 나를 받아들여달라, 날 사랑해달라 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이제 그만 어머니 자신을 용서해줬으면 좋겠어요.” 츠무기는 어머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머니는 고개를 숙이고 울었다. 나츠메는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이 이상은 자신이 발을 들여선 안 되는 철저히 사적인 영역이었다. 그는 방에 들어가 있겠다며 소라의 손을 끌고 츠무기의 방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계속해서 울고 있었다. 아버지는 믿을 수 없단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알고 있었니? 알고 있었니...! 네가 외할아버지가 강간해 태어난 애란 걸...!” 그녀의 말에 아버지는 망연자실해 하다가 츠무기와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그는 마치 어린애처럼 울기 시작했다. “둘 다... 둘 다 너무 고생했어...! 고마워! 살아있어줘서 고마워! 내 아내와 아들이 되어줘서 고마워!!” “하하... 그렇게 말하면 죽는 게 당연한 것처럼 들리잖아요.” “으어, 아니... 그런 의도가...! 나는... 나는... 상상도 못할 만큼 아팠을 테니까...! 츠무기! 여보! 허어엉... 고생했어...!” 아버지는 그 말을 마무리 지으면서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츠무기는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마에 키스를 퍼부을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작고 따뜻한 바람이 그의 마음 속 작은 정원에 부는 게 느껴졌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같이 끌어안았다. 한동안의 시간이 지나고 어머니가 기력을 다해 거의 실신하듯 아버지에게 기댔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시계를 보니 벌써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츠무기는 나츠메와 소라를 데리러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나츠메의 무릎을 베고 소라가 잠들어 있었다. 츠무기는 그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들에게 민폐를 끼치고 말았다. 츠무기가 소라를 업고 버스가 다니는 곳까지 나츠메를 바래다 주기로 했다. 봄이 왔어도 아직 밤거리는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나츠메는 옷깃을 여몄다. 둘은 별다른 말 없이 골목을 걸었다. “하하, 못 볼 꼴을 보였네요.” 침묵을 먼저 깬 건 츠무기였다. 그는 부끄럽다는 듯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못 볼 꼴 보인 게 한두 번이야?” 츠무기의 말에 나츠메는 투덜거리듯 대답했다. 울었는지 목소리가 완전히 잠겨 있었다. 눈가도 붉었다. 츠무기는 웃었다. “분명 일이 이렇게 풀린 건 나츠메 군과 소라 군이 마법을 걸어줬기 때문이겠죠.” 츠무기의 말에 나츠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 마법은 걸었다. 하지만 그녀가 그렇게 반응한 것이 자신의 마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그녀가 만약 마법에 걸렸다면 그건 츠무기의 마법이었을 것이다. 나츠메는 알 수 있었다. 달빛이 츠무기를 비쳤다. 어머니를 닮아 단정하고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표정은 온화하고 다정했다. 나츠메는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맑은 눈망울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섬세하면서 오뚝한 콧날이, 힘든지 약간 벌린 모양새 좋은 입술이, 갸름한 얼굴이, 바람에 흔들리는 보드라운 앞머리가 시선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나츠메는 원망했다. 먼저 만났는데, 자신이 먼저 마음을 허락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차라리 마음 놓고 미워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어째서 츠무기는 이렇게나... 차라리 그가 마법에 잘 걸리는 타입이었다면, 모든 것을 황제의 탓으로 돌리고 츠무기를 마음껏 사랑하고 행복의 마법을 퍼부어 현실이나 과거가 그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보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과거는 문제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행복 아래서 츠무기가 진심으로 웃는 것을 지켜보며 함께 웃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츠무기는 나츠메의 망상을 비웃듯 그의 마법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과거도 현실도 그대로 받아들이며, 자기보호라곤 무의식 차원에서 일어나는 고통 차단만을 겨우 유지한 채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리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는 판타지 세계가 아닌 평범한 세계에 사는 평범한 개인이었고 그의 삶은 소설도 동화도 아닌 평범한 현실의 인생이었다. 과거의 고통도 있고 잘못도 있고 현재의 장점도 단점도 있었다. 누구도 그를 한 순간에 고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나츠메에게 한계를 뚜렷이 인식시키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의 앞에서 나츠메는 그저 평범하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 기껏 무언가가 된다면 과거의 잘못으로 피해를 입은 속죄 대상이었다. 결코 에이치처럼 존재 자체로 그의 행복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에이치처럼 그를 상처 입힐 수도 없었다. “앞으론 어머님도 잘 해주시겠지.” 나츠메가 말했다. “하하, 글쎄요. 한 순간 기분에 휩쓸린 거라고 봐요. 어머니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질 수는 있겠지만 없던 사랑이 갑자기 생겨날 순 없으니까요. 아마 앞으로도 나를 사랑해주진 않으실 거예요. 이래저래 포장을 해봤자 존엄을 짓밟히고 상처 입었던 과거의 증거에 불과하니까요. 결코 사랑할 수 없을 거예요.” 츠무기는 웃었다. 자조인지 습관적 웃음인지 알 수 없었다. “부모자식간이란 것만으로도 사랑하기엔 충분해.” “네, 부모란 그래야 하는 존재죠. 나는 어머니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와는 별개로 어머니 때문에 겪어야만 했던 일에 대해서는 원망하기도 해요. 하지만 어머니의 사정에 대해선 이해할 수밖에 없죠. 날 버리지 않고 계속 안고 있어준 것에도 감사하고 있어요. 지금도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원하고 있죠. 결국 이 이율배반적인 감정은 얻을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갈망일 뿐이겠네요. 끝없이 갈망하고 좌절하고 부정적인 감정을 쌓아가요. 하지만 그래도 사랑해서 또다시 갈망하고 말죠.” “인간은 혼자선 살아갈 수 없어.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갈망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하하, 네. 하지만 부모의 사랑은 본능적으로 프로그램된 게 아니란 건 마음이 아프네요.” 나츠메는 마음이 아팠다. 츠무기가 정말로 마음 아픔을 느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애석함이나 그 비슷한 감정은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거짓말을 한 날엔 자축이라도 해야 할 터였다. 적어도 자기 보호 기능이 일부라도 돌아왔다고 볼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일로 나도 마음이 조금 편해지긴 했네요. 내 일이었을 땐 안 보이던 게 남의 일이 되니 오히려 좀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어요. 뭔가 해결된 것 같은 기분도 들고요.” 택시에 타는 나츠메의 옆 자리에 소라를 내려놓으며 츠무기는 말했다. “나츠메 군 덕분이에요. 고마워요. 나츠메 군은 상냥하네요.” 나츠메는 그 말에 다시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당장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자신이 상냥한 게 아니었다. 츠무기가 강한 것이었다. 그는 사랑받아 마땅했다. 자신이 처음 그에게 시도했던 마법처럼. “쓸데없는 소리 마. 내일 학교에서 봐.” 나츠메의 타박에 츠무기는 활짝 웃고선 택시에서 물러났다. 문이 닫히고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밤의 거리를 달리며 나츠메는 기도했다. 사랑받아 마땅한 자가 사랑받길. 행복해질 자격이 있는 자들이 행복해지길. 온 거리에 행복이 가득하길. 츠무기도, 소라도, 그리고 자신도 온누리에 축복이 가득하길. 단 하루뿐일지라도 행복의 마법 속에서 현실의 짐을 내려놓고 기쁨을 만끽하길. 흘러가는 네온사인의 물결 속에서 나츠메는 마법을 걸고 또 걸었다. 누구에게라 할 것도 없이.
영진이 간 곳은 도시 중에서도 동남쪽에 위치한 거대한 건물 앞이었다. 날카롭게 빛을 반사하는 미끈하고 날렵한 빌딩 앞에서 영진은 건물을 오른쪽으로 우회했다. 스페키는 뭐가 뭔지 모른 채 그의 뒤를 따랐다. 둘은 건물의 유리벽 앞에 섰다. 벽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어딘가로 통할 법한 통로와 매끈한 바닥, 그리고 벽이 존재할 뿐이었다. 스페키는 영진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봤다. 출입구라면 저기 있던데, 잘못 찾아온 건 아닐까? 스페키가 의문을 가질 동안 영진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만 유리벽 앞으로 가 거대한 유리 중 하나를 손으로 밀었을 뿐이었다. 거대한 유리벽은 놀랍게도 소음도 없이 부드럽게 안쪽으로 열렸다. 그러자 건물 안쪽의 모습이 바뀌었다. 스페키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AI 구역은 다 이런가요?” 벌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묻자 심드렁한 대답이 돌아왔다. “AI 구역이라니, 재미있는 명칭이네요. 근본주의자 거주구역을 제외한 나머지를 총칭하는 말인 거죠? 전세계라든가, 근본주의자 거주구역을 제외한 전지구라든가.” 영진의 말에 스페키는 입을 비죽거렸다. 확실히 자신들이 소수이긴 했으나 그걸 이런 식으로 느끼게 해야 했나. 너무하다. 무례하다. 이런 말이 떠올랐지만 일단 입을 다물고 그를 따라가기로 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유리벽에서 조금 떨어진 구석진 곳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비상구 마크는 없었지만 비상구와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다만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없었고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금속으로 된 문에서 손을 놓자 자동으로 문이 닫히며 빛이 차단되었다. 계단은 이내 어두컴컴해졌다. 계단을 내려가자 마찬가지로 어두컴컴하고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역시 빛이 거의 없었고 바닥엔 케이블이 뱀처럼 얽혀 길다랗게 이어져 있었다. 주변엔 온통 직사각형의 물체들이 책꽂이처럼 벽을 지키고 서 있었는데, 스페키는 그게 컴퓨터란 것을 알아봤다. 팬 돌아가는 소음이 낮게 깔리고 작동을 나타내는 불빛이 어지러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컴퓨터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도서관의 책장처럼 진열되어 있었다. 그 컴퓨터들은 중앙으로 가는 길을 만들고 있었는데, 중앙엔 어느 정도 빈공간이 있어서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 빛이 있어 이 공간이 완전히 어둠에 침잠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둘은 컴퓨터들이 만들어놓은 미로를 따라 중앙을 향해 갔다. “안녕, 영진. 오랜만이야.” 컴퓨터들 사이에서 약간 걸걸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니엔.” 영진이 인사했다. 둘이 다다른 곳은 컴퓨터들이 공간을 만들어준 곳, 이 곳의 중앙, 빛이 새어나오던 그곳이었다. 거기엔 컴퓨터들과 연결된 12개의 모니터와 스피커, 입력장치, 니엔이라 불린 여자가 앉을 책상과 의자가 있었고, 단촐하게 조금 오래된 듯한 소파와 탁자가 놓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른편엔 아마 간단한 생활을 하기 위한 집기들이 놓인 작은 천막도 있었다. 뒤로는 또 컴퓨터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리고 소파와 모니터 사이에 니엔이 서서 그들을 맞았다. 마르고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쭉한데 어깨는 앞쪽으로 굽었고 눈은 크고 얼굴은 영진보다 몇 살은 어려 보이는 기묘한 인상의 여자였다. “여기서 사는 사람이에요? 화장실 볼일은 어떻게 해결한대요?” 스페키가 영진에게 속삭였지만 영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니엔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가 다시 휘었을 뿐이었다. “어서와. 이게 얼마만이지? 연락한 지도 오래 되지 않았어? 어째 마른 것 같아.” 니엔이 영진을 향해 긴 팔을 벌렸다. 영진은 그 안으로 다가갔고, 자신을 끌어안는 팔에 화답해 어색하게 그의 등을 살짝 안았다. 스페키는 그런 그들을 멀뚱히 바라봤다. “이쪽은 누구야? 손님이신가?” 니엔이란 사람이 드디어 스페키를 가리켰다. 스페키는 익숙하게 미소지었다. “아, 이쪽은 스페키에스 씨. 손님은 아니고 그냥... 일행이야. 스페키에스 씨, 이쪽은 니엔이에요.” “안녕하세요.” 스페키가 손을 내밀었다. 니엔은 스페키의 얼굴을 잠시 보다가 손을 잡았다. 그는 미묘한 얼굴을 했다. “그래, 오늘 일행까지 데리고 온 이유가 뭐야?” 니엔이 모니터 앞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물었다. 영진과 스페키도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아, 그게... 놀라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영진이 말에 뜸을 들였다. 니엔은 팔짱을 끼고 빨리 말을 하라며 눈빛으로 독촉했다. 영진은 조금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날 방주에 태워줬으면 좋겠어.” 영진의 말에 스페키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그를 쳐다봤다. 니엔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말이 한 번에 와 닿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방주라니 무슨 방주 말이야?” “출항의 날에 출발하는 방주 말이야. AI들의.” 영진의 대답이 끝나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할지 니엔도 스페키도 속으로 헤아리고 있었다. AI의 방주라니, 생각지도 못 한 대답이었다. 분명 AI의 종교에 기대겠다고 말은 했지만 이런 것이었을 줄이야. “도대체 그게 왜 타고 싶은데?” 니엔이 물었다. 영진은 잠시 말을 골랐다. “방주가 어떤 건지는 알고 있지?” 당연한 거 아냐. 니엔의 답에 영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래에게 마루를 되살려달라 할 거야.” 영진의 대답에 니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기세에 의자가 책상 모서리에 부딪쳐 옆으로 쓰러졌다. 콰당탕 소리가 기둥들에 부딪치며 퍼졌다. 스페키는 놀라서 주먹 하나 크기 만큼 몸을 물리며 가슴에 손을 얹었고 영진은 예상한 듯 꼼짝도 앉고 앉아 엄지손가락을 서로 문질렀다. “하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우리 영리했던 영진이가 어쩌다 이런 말을 다 꺼내게 됐을까?” 니엔이 긴 팔을 어깨 높이로 들었다 내리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저 그뿐인데도 공기가 새는 음산하고 허스키한 목소리와 큰 키, 마르고 긴 팔 때문에 상당히 위협적으로 보였다. 영진은 눈썹 한 쪽을 찌푸렸다. “「고래는 죽어있던 아담을 하와로 새로 태어나게 하고 세상의 지혜를 줬습니다.」 이게 말하는 게 성전환이 아니란 건 너도 알고 있잖아. 완전한 소멸과 창조가 아니면 그 ‘지혜’라는 것도 신빙성을 잃어. 기적을 행하는 존재였기에 그들의 종교로서 자리할 수 있었던 거야.” “허, 그래서 그게 마루를 되살려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니엔이 비웃었다. 신경질적인 기색이 어려 있었다. 영진도 한숨을 쉬었다. 눈두덩을 비비는 손가락 끝엔 이해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짜증이 서려 있었다. “너는 해커잖아.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 방주에 대한 정보를 이미 가졌던 게 있을 것 아냐. 하다못해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돌아올 수 있는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 찾아온 거야.” 영진의 말에 니엔은 차분히 의자를 도로 세워 가져와 앉았다. 그는 푹신한 등받이에 거칠게 등을 기대고 이마를 긁적거리곤 발바닥을 까딱거렸다. 그러다 잠시 의자 바퀴를 이용해 왼쪽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턱을 괴고 영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의자를 한 바퀴 빙글 돌렸다. 스페키는 그런 니엔의 행동을 힐끔 보며 영진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지금 날 데리고 헤커한테 온 거예요?” “내가 데려온 게 아니라 당신이 날 따라온 거잖아요.” 그들의 속삭임과 동시에 니엔의 움직임이 멈췄다. 니엔의 시선이 스페키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영진의 소매를 잡고 있던 손가락이 멋쩍게 떨어졌다. 그의 시선은 오싹한 데가 있었다. “물론 나는 너보단 많이 알고 있지. 그래서 하는 말이야. 방주에 타려고 하는 건 그만둬. 개죽음이 될 거야.” “어떻게 그렇게 단언하는 거야?” “왜냐면 내가 해커여서 요 몇 년 간 방주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했던 애들이 다 죽었단 걸 알고 있기 때문이지!” 니엔의 말에 영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그래도 상관없다’라고 니엔에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문제였다. AI가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예전 한 남류작가가 썼던 ‘로봇 3원칙’은 어디까지나 옛날 사람의 인간에 대한 낙관에 불과했다. AI는 필요하다면 인간을 죽일 수 있도록 프로그램 되었다. 인간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적대하는 사람이 죽길 원하는 건 권력을 가진 자건 가지지 않은 자건 똑똑한 자건 멍청한 자건 마찬가지였다. 설사 살해를 하지 못하도록 설계자가 프로그래밍 했었다 하더라도 그의 상사가, 그의 상사의 상사가, 상사의 상사의 상사가, 그 보다 더 위의 사람들이 그 부분을 삭제하도록 했을 것이었다. 물론 인간에 의한 살인이 AI에 의한 살인보다 훨씬, 압도적으로 많이 일어나긴 한다. 그러나 AI는 인간을 죽일 수 있다. 필요하다면 영진을 죽일 수 있다. 스스로도 그걸 알고 있었다. “위험하다면 여태까지 알고 있었던 것만이라도 가르쳐주면 안돼?” “가르쳐주면 어쩔 건데?”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거 협박이지?” “아니, 죽어도 네 이름은 말하지 않을 거야.” “역시 협박이잖아!” 니엔이 책상을 가볍게 내려쳤다. “있는도 않은 것에 목숨 걸지 말라고 하는 거야. 내 말 못 알아들어?” 영진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확신하지? 있는 것도 확인되지 않았지만 없는 것도 확인되지 않았어!” “너도 그런 거 없다고 생각해왔잖아? 도대체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러는 거야?”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다. 평균수명은 2015년 기준 82.06세로, 1980년의 65.69세에 비해 16.37년 늘어났다. 대단히 빠른 속도로 늘었으며, 국내 최장수 할머님의 연세는 2017년 2월 10일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113세라고 한다. 한국국토정보공사에 따르면 2030년에 이르면 1인가구의 비율은 33%에 이를 것이라 한다. 물가는 미친듯이 오르고 약자들은 배척하겠다고 선언하는 레드준표의 지지율이 24%에 이르고 각자도생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1988년 최저임금 생계비 충족률이 79.8%였던 것이 69.6%로 떨어졌다. 외벌이로 2인, 3인 가구를 충당하려면 최저임금으로는 생계비 충족률이 43%, 33.9%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기업들은 최저임금을 기준임금으로 삼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의 상황도 상황이지만, 대중의 성향 변화는 조금 더 암울하다고 볼 수 있다. 최악의 불경기 아래서 배타와 혐오와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무임승차자”에 대한 적대감이 위험치에 달한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들은 일베를 하면서, 뉴스를 보면서, SNS를 통해서 자신의 암울한 상황과 고됨의 원인을 경제적 약자에게서 찾는다. 이는 아직도 냉전시대의 전쟁과 가난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장년층 이상의 세대에서 물려받은 것으로 보이기도 하고 혹자는 국정원과 모 정당의 정치 게임으로 인한 분열이라 하기도 한다. 불경기가 심해지자 극도의 우경화를 통해 전쟁을 하고 선민의식을 고취시켜 내부 결속을 강화하고 착취와 학살로 시스템을 공고히 하려 했던 독일의 전적도 있다. 미국에서 오바마 연임 직후 트럼프가 선출되고 일본에서 전쟁 위협을 높이는 아베가 총리직을 연임하고 중국이 동북아공정을 공격적으로 밀어붙이며 대만을 괴롭히고 필리핀에서 두테르테가 아직도 압도적 지지를 얻고 있는 것을 보면 두 발로 걸어다니며 타인을 괴롭히는 것과 파괴하는 것 이외에 딱히 재주가 없는 인류란 이름의 호미니데(Hominide: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을 포함하는-두산백과 참조)의 본성이 원래 그런 것인가 싶기도 하다. 문제는 현재 20대와 30대는 이런 상황에서 최저임금을 받아가며 평생을 일하며 50년 후 얼마나 늘어났을지 짐작하기 힘든 기대수명을 버텨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체가 소모품이다. 관절 연골은 활동하는 만큼 닳는다. 심장은 뛸 수 있는 횟수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 안타깝게도 뇌는 아끼면 아낄수록 바보가 된다고 하지만 필요이상으로 혹사시키면 혹사시킬수록 스트레스와 과부하가 걸려 우울과 같은 정서적 정신적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사무직은 앉아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혈전이 생겨 혈관을 막을 위험성이 증가하고 하지정맥류가 생길 위험성이 있으며 이는 연령이 증가함에 따라 콜레스테롤이 증가해 혈관이 가늘어진 상태에서 각종 혈관질환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최악의 경우 뇌졸중으로 오게 된다. 현장직은 물론 사고의 위험성이 높고 눈, 척추, 손가락, 팔목, 팔꿈치, 어깨, 무릎, 발목과 같은 곳에 무리가 오게 되어 심장은 뛰고 있으나 눈이나 척추, 관절이 수명을 먼저 다하여 최악의 고통을 안고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할 수 있다. 물론 병증으로 인한 노동 정지와 빈곤은 서비스로 따라올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대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가장 먼저는 근로시간 단축이다. 현재 한국의 근로시간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길다. 심지어 실제보다 상당히 축소시킨 데이터였음에도 세계 2위를 먹었다. 안타깝게도 2016년 여당이 주말도 근로시간으로 인정해야 한다며 주당 근로시간을 늘려버리는 바람에 명맥만이라도 주5일을 표하던 중소기업들이 대부분 주6일 내지는 격주6일로 돌아섰다. 과로사 사례가 빈번하게 이어져도 일단 ‘회사는’ 돌아가고 소비자들은 노동권에 지나치게 둔한 풍토 때문에 또다시 회사는 과로사를 생산한다. 그렇게 해도 되기 때문이다. 과로사한 직원의 자리는 남아있는 직원만으로 채운다. 그렇게 해도 어떻게든 돌아간다. 그러면 또다시 과로사하는 직원이 나온다. 괜찮다. 회사는 타격을 받지 않는다. 이미 밤 10시, 새벽 2시에 퇴근시키는 상황에 익숙하고, 그것을 회사에 대한 충성으로 여긴다. 12명분의 일을 7명에게 시켰는데 한 명이 죽어 6명이 되어 인건비도 적게 나간다. 회사 이미지에 금조차도 가지 않는다. 요즘 같은 시대에? 요즘 같은 시대에도다. 연봉은 포괄연봉제로 야근수당을 주는 곳도 거의 없다. 유가족은 산재는커녕 위자료조차 받지 못한다. 매일 야근하느라 힘들어 운동도 못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는데 그게 자기관리 태만으로 죽은 건지 과로사인지 알 게 뭐야. 사장뿐만 아니라 근로자조차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갑을 이해하는 데 익숙하다.
그렇다면 근로시간 단축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먼저 해야할 것은 운영진들을 전문가들로 채우는 것이다. ‘경영’의 전문가들만 있어서는 안 된다. ‘업계’의 전문가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상부의 정확한 비전과 디렉션이 있어야 낭비가 적다. 그냥 돈이 많아서 사업 좀 해봐야 겠다는 60~80년대를 주름잡았다던 꼰대 사장들에겐 희망이 없다. 로고, 카피라이트, 콘셉트를 선정하는 센스나 심미안은 물론이거니와 시장을 선택하는 눈조차도 없다. 그렇다고 그들이 경영을 잘 하느냐 하면 꿈과 희망으로 맨땅에 머리만 갖다박고 머리 쓸 일 없이 일만 하다가 적당히 은행에 몫돈만 짱박아놔도 알아서 재산이 불어나던 그 시절의 꼰대가? 돈이 많고 나이가 많고 남자란 이유로 온갖 넙죽넙죽네네만 받아왔던 그들의 머릿속에서 효율적인 일처리나 근로자와 사업주는 계약관계의 동등한 인격자라는 사실이나 세월이 흘러 시대가 달라졌다는 사실 따위는 이미 사라져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들이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경영을 할 것이란 기대는 거의 제로에 수렴한다. 훌륭한 디자인과 혁신적인 기술은 이런 사람들의 퇴짜로 사장되고, 온갖 시행착오 끝에 촌스럽고 퇴행적인 온갖 디자인과 프로젝트, 제품들이 시장에 전시되는 것이다. 물론 아직도 후진국 마인드에 사로잡힌 경영자들에 의해 국내외의 성공한 디자인이나 제품의 ‘짝퉁’들 역시 생산되어 그들과 함께 진열된다. 대단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인들의 끔찍한 교육열과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노동시간은 이 과정에서 대단히 낭비되고 끔찍이도 낮은 생산성을 기록하게 된다.
두 번째는 사회에 만연한 군대문화 해소다. 이 문화는 대단히 사람들의 창의성을 억누르고 무기력을 학습하게 하며 거의 모든 직장인들을 공무원화 시킨다. 뿐만 아니라 이는 사회의 윤리성을 해치는 가장 큰 요소이기도 하다. 생산성의 저하는 너무나도 당연하다. 익숙한 것이 아니면 아무도 기획하지 않고 말하지 않으며 누군가가 말해도 묵살되기 일쑤다. 개개인의 개성을 말살하고 다양성을 해치며 남들 혹은 상사의 KIBUN을 맞추는 데 지나치게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게 한다. 능력보다도 KIBUN을 잘 맞추거나 상사의 시중을 잘 드는 사람이 승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렇게 승진한 무능한 상사가 또다시 유능하거나 창의적인 신입에게 자신과 같이 굴기를 강요한다. 이런 상황이 오랫동안 반복되면 상상력 부재가 회사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이는 회사의 관료화를 뜻한다. 우리나라는 이 문화와 오랫동안 싸워왔고 예전보다는 훨씬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군대문화는 너무나 공고해 보인다. 그 모든 시스템 전환과 온갖 궁리들이 무색할 정도다. 그렇다면 여기서 보강해야 할 것은 여성 고용 확대와 수평적 가족문화 캠페인, 성평등의 강화를 위한 노력이다. 또한 업무 강도와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 필수다. 인간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받을수록 구실을 찾아 타인에게 가혹하게 구는 경향이 있다. 상명하복의 관계는 하급자를 고문하기에 최적화된 관계다. 사회가 불평등할수록, 스트레스가 많을수록 인간은 인간을 괴롭히고 군대문화를 강화한다. 불평등과 업무강도와 노동시간을 줄일수록 우리는 군대문화에서 더 멀리 벗어나게 될 것이다.
세 번째는 법안의 강화다. 말해 입 아프다. 노동시간 제한을 강화하고 최저연봉을 현실화하고 포괄연봉제를 못하도록 해야 한다. 야근을 시키는 것이 사람을 더 뽑는 것보다 훨씬 돈이 많이 들도록 해야 한다. 하나라도 빠져선 안 된다. 주6일제가 뭐냐 주6일제가.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
이것들이 이루어지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것으로 예상된다. 생산성이 올라가고 일자리가 늘어나며 국민의 수입은 곧 국가의 세금 수입으로 이어질 것이다. 업무강도가 낮아지면 그만큼 노동자들에게 여유가 생긴다. 여유가 생긴다는 것은 노후 준비로도 이어진다. 노인이 비참함과 고통에서 멀어질수록 의료와 복지에 들어가는 비용도 줄어든다. 물론 쓸모없는 노인 다 죽어라 하며 내팽개치는 경우 노인의 의료와 복지에 들어가는 비용이야 줄어들겠지만 그들의 가족인 젊은 세대들이 어떤 영향을 받을지 그 사회적 비용을 생각하면 모두를 트라우마와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것보다는 노인이 행복한 게 낫지 않을까 생각된다. 보다 많은 사람이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출생율도 올라갈 것이다. 우리가 ‘내’가 아닌 모두의 행복에 대해 생각해야 할 이유다.
물론, 나는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발전의 방향은 사회주의에 있으며 대물림의 개념을 없애고 가족주의를 해체하고 인류가 생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며 인류가 살아가는 구간을 아주 일부로 제한하는 것이 절대다수의 행복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차피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그거 못 볼 것 같으니 이런 미봉책이라도 말해본다.
초저녁 석양이 담요처럼 하늘을 덮었다. 깊은 산속에 턱을 괴고 잠들어 있던 밤혹등고래는 기지개를 켜듯 몸을 쭉 펼치며 부르르 떨었다. 그 거대한 몸짓에 새들이 푸드덕거렸고밤혹등고래의 등에 올라타 있던 병아리와 토끼도 잠에서 깨어났다. 밤혹등고래는 옆 지느러미로 옆구리를 툭툭 털었다.
“잘 잤어?”
토끼가 기지개를 켜며 인사했다. 밤혹등고래는 토끼의 체온과 기척을 느꼈다. 그보다 더 조그만 병아리의 감촉도 느껴졌다. 그녀는 새삼 반가움에 입을 옆으로 벌려 웃었지만 곧 다시 왼쪽 지느러미로 옆구리를 툭툭 쳤다. 옆구리가 근질거리고 화끈거렸다. 뭔가가 그녀의 등으로 올라가기 위해 나무를 타고 옆구리에 발톱을 박아 올라온 게 분명했다. 등으로 그 정체불명의 방문자의 체온도 느낄 수 있었다.
“잘 잤니? 새로 온 친구도 안녕?”
밤혹등고래가 인사하자 낯선 동물이 그녀의 등을 타고 토끼와 병아리에게 다가가는 것이 느껴졌다. 토끼는 움찔거렸다.
“안녕하신가?”
토끼는 옆으로 누워 방문자를 쳐다보았다. 방문자의 정체는 하얀 바탕에 노란 줄무늬가 있는 오동통하고 꾀죄죄한 치즈태비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날카로운 눈매로 황금색 눈동자를 빛내며 토끼와 병아리 앞으로 와 앞발을 가슴팍에 모으고 엎드렸다.
“누구야?”
말을 할 수 없는 병아리 대신 토끼가 물었다. 고양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나는 ‘꼬리 잘린 고양이’외다.”
토끼는 눈을 가늘게 떴다.
“거짓말! 꼬리가 멀쩡히 붙어 있잖아!”
“아니, 내 이름이 ‘꼬리 잘린 고양이’외다. 이래뵈도 생전엔 꼬리가 반토막이 나 있었거든.”
토끼는 꼬리 잘린 고양이의 길고 통통한 꼬리를 보았다. 생전에 꼬리가 없었는데 어떻게 죽어서 꼬리가 자라났을까? 무슨 이유에서일까? 토끼는 자신의 가늘고 볼품없는 뒷다리와 꼬리 잘린 고양이의 온전한 꼬리를 비교하며 보았다.
“그래, 꼬리 잘린 고양이야. 무슨 일로 우리를 찾아왔니? 너도 천국을 찾아서 왔니?”
밤혹등고래가 물었다.
“아니, 나는 지금의 자유로운 생활에 만족하고 있소이다. 그보다도 익숙한 냄새에 이끌려 왔소이다.”
고양이는 대답하며 앞발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익숙한 냄새라니, 무슨 냄새를 말하는 것일까? 길 잃은 동물들의 냄새? 절망의 냄새? 고양이는 절망과 별 관련이 없어 보였다. 토끼와 병아리는 유심히 고양이를 쳐다보았다. 고양이는 웃었다.
“나도 실은 인간 곁에 잠깐 있었던 적이 있었다오.”
고양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양이는 원래 길에서 태어났다. 꾀죄죄하고 먹을 것이 부족한 거리 생활에서도 고양이는 어떻게든 생존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길 위의 삶이 으례 그렇듯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고양이는 인간에게 의존함으로서 약간의 안락함을 얻고자 했다.
밥을 주던 인간은 고양이의 꼬리에 끈을 꽉 묶었다. 끈은 조직을 괴사시켰고, 고열과 고통 속에서 묶인 부분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겨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동안 고양이는 인간을 멀리했다. 또 누군가 약간 남은 꼬리를 묶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멀어진 삶은 고단함으로의 귀환을 의미했다. 고양이는 지쳤고, 자주 탈수에 시달렸다. 배고픔에 쥐를 잡으려 해도 잘린 꼬리 때문인지 그간 밥을 얻어먹던 버릇 때문인지 쉽지가 않았다. 배고픔과 탈수에 허덕이던 고양이는 길 위에 쓰러졌고, 그런 고양이를 또다시 인간이 주웠다.
고양이는 인간의 집 베란다에 살게 되었다. 여전히 꼬질꼬질했지만 밥과 물은 나왔다. 이번엔 잘 해보리라 생각했다. 그 집의 자녀들이 나오면 무릎 위에 앉아 애교를 부렸다. 아이들은 순진했고 자신을 좋아했다. 고양이는 이제 좀 팔자가 펴려나 생각했다.
그러나 그 집의 어른 중 하나가 또 자신을 길 밖으로 내쫓았다. 고양이의 생활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후로 며칠간 고단한 삶을 더 이어갔고, 도로변에서 마실 것이 없어 탈수로 죽었다. 그 시신은 또다시 인간이 주워 주택가 한구석에 마련된 조그만 화단에 묻어줬다.
고양이의 이야기를 들은 토끼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인생과 자신들에게서 나는 익숙한 냄새 사이에 무슨 접점이 있는가? 고양이는 또다시 웃었다.
“자네들의 꼴을 보아하니 억울함이 온몸을 짓누르고 있구만. 죽고 나서까지 생전의 고통을 겪는 건 마음에 맺힌 응어리가 있기 때문이외다.”
고양이의 말에 병아리가 발을 버둥거렸다. 병아리는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딱 붙은 다리를 버둥거리는 것으로 의사를 표현했다. 병아리는 최선을 다해 고양이의 말을 부정하고 있었다. 애처로운 움직임이었다.
“아니라고? 나를 봐! 나는 ‘꼬리 잘린 고양이’였지만 꼬리가 멀쩡해졌잖아!”
고양이는 약간 억울함을 호소하듯 말했다. 토끼는 미심쩍은 눈빛을 했다. 애당초 ‘꼬리 잘린 고양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실제로 꼬리가 잘렸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까 익숙한 냄새가 난다고 했지? 무슨 뜻이야?”
토끼가 물었다. 고양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아리와 토끼 사이로 걸어들어가 둘의 정수리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고양이는 머리를 높게 들고 숨을 들이켰다.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병아리는 냄새가 많이 풍화되었지만 토끼 자네에겐 냄새가 담뿍 묻어 남아있소이다. 즉, 자네 둘은 한 인간을 공유했던 것이외다.”
토끼는 벌떡 일어났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아니, 말을 잘못 했네. 우리 셋이 같은 인간을 가족으로 둔 적이 있단 이야기올시다. 내가 제일 먼저 그와 같이 살았고, 그 뒤에 저 불쌍한 병아리 양반, 그리고 토끼 자네로 이어진 것이올시다.”
그는 겁을 먹었다. “어머니”가 이번에도 사람을 죽이지 못하면 대신 그를 죽여버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실제로 어머니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힘도 들이지 않고 순식간에 해치웠다. 그는 억울한 죽음을 앞에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와 “어머니”에겐 특별한 힘이 있었다. 먼저 그의 어머니를 말하자면 그녀에겐 금기(禁忌)의 능력이 있었다. 범위를 정해서 무엇이든 상대방의 행위를 금할 수 있었다. 예컨대 그에게 내려진 어머니의 금기는 이런 것이었다. ‘어머니에게서 3km 이상 벗어나지 말 것’, ‘학교 이외의 곳엔 어머니의 허락이나 동행 없이 가지 말 것’, ‘학교 이외의 곳에서 2시간 이상 어머니와 떨어져 있지 말 것’, ‘어머니의 연락을 무시하지 말 것’, ‘어머니의 말을 거역하지 말 것’,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말 것’, ‘어머니와 관계된 이야기를 하지 말 것’, ‘집안 이야기를 하지 말 것’, ‘다른 사람을 때리지 말 것’과 같은 속박이었다. 다만 사람을 죽일 때는 조금 다른 것을 금지했다. 먹지 말 것, 마시지 말 것, 잠을 자지 말 것, 숨을 쉬지 말 것과 같은 것을 주문하는 모양이었다. 그것들은 어머니가 상대방에게 직접 말을 함으로써 적용되는 속박이었다.
그리고 그의 힘은 두 가지였다.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문을 여는 힘과 ‘건축’의 힘이었다. 후자는 자신의 이미지를 구현하여 쌓아 올리는 것이었다. 다만 그 과정에 시간이나 자재는 필요 없었다. 필요한 것은 구체적인 상상과 그의 특별한 능력뿐이었다. 그러고자 하면 언제 어디서든 상상한 것이 만들어졌다. 그는 그 능력에 만족했다. 실력도 탁월했다. 그는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해체하는 것을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곧잘 하던 놀이였다. 그 능력으로 인해 그의 인생이 고달파지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능력이 없어지길 바란 적은 없었다. 조금 더 도움이 될 만한 능력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해본 적은 있었어도.
문을 여는 것’은 조금 성질이 다른 것이었다. 먼저 그가 허공에 문의 형상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미지 상의 문을 열면 ‘다른 세계’로 이어졌다. ‘다른 세계’는 단 한 톨의 빛도 없는 곳이었다. 앞뒤도 분간할 수 없고, 딱히 장애물이나 돌부리 같은 것도 없었다. 그 때문에 아무렇게나 걸어도 어디 부딪칠 일은 없었지만, 너무 어두워 균형을 잃고 넘어질 때도 있었다. 넘어질 때 추락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실제로 추락을 하기도 했다. 앞뒤좌우아래위의 개념도 없었고 ‘바닥’ 역시 절대적이고 물리적인 ‘바닥’이 아니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바닥이었고, 바닥을 인식하지 못하면 그대로 추락해 미아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는 이 ‘다른 세계’를 상당히 어릴 때 발견했었다. 문을 여는 것은 할 수 있었지만 즐겨 하지 않았다. 문 너머의 세계가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거기엔 ‘눈 먼 거인’이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 우연히 눈 먼 거인이 비명을 질러대던 누군가의 머리통을 부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손전등으로 그들을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분명히 거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들켰을 거라 생각했었다. 거인이 피투성이가 된 둔기를 들고 다가오는 동안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꼼짝없이 거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심장이 오그라들 것만 같았다. 분명히 거인이 자신의 작은 머리통도 부숴버릴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거인은 살인 현장을 비추고 있던 그를 스쳐 지나갔다. 다만 멀리서 다른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자 그곳으로 쿵쿵 뛰어갈 뿐이었다. 그는 그 뒤로 한동안 그곳을 찾지 않았다. 지금의 “어머니”와 함께 살기 전까지 말이다.
“어머니”를 만난 이후로 그는 다시 ‘다른 세계’를 열게 되었다. 희한하게도 그곳으로 들어가면 어머니의 장소에 대한 속박은 사라졌다. 시간에 대한 속박은 느슨해졌다. 거기선 시간 역시 느리게 흘렀다. 마치 장소 자체가 그러하듯 시간의 밀도 역시 희박했다. 눈 먼 거인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머니”에 비하자면 공포조차 되지 않았다. 그곳은 그의 유일한 도피처가 되었다.
그는 문을 열고 다른 세계에서 “어머니”가 지정한 목표자가 있는 곳으로 나왔다. 불 꺼진 거실이었다. 대리석 바닥에 크고 두꺼운 암막커튼, 천장에 묶인 거대한 샹들리에, 그 아래 묵직한 탁자와 주변을 둘러싼 고급스러운 소파, 그리고 탁자 중앙에 놓인 생생하게 핀 꽃이 거실을 차갑고 위압적으로 꾸미고 있었다. 그는 목표자를 찾았다. 가장 중앙의 가장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중년 남자였고 광택이 있는 실크 나이트 가운을 입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그가 얼마나 권위 있는 사람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있으며 중요한 사람인지 나타내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 앉은 주인은 그다지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탐욕스럽고 지위와 탐욕에 비해 머리가 나쁘고 판단력이 둔한 중장년의 평범한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목표자에게 약간의 연민을 느꼈다. 그러나 해야만 했다. 어머니가 근처에서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는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갔다.
“누구야!!”
빛에 그의 모습이 노출되자 목표자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그는 또다시 덜컥 자리에 얼어붙었다. 괜찮아. 생각해둔 방법이 있어. 그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고 자신도 다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어. 두려움에 얼어붙는 스스로를 격려했다. 그는 목표자가 느린 걸음으로 벽난로를 향해 걸어가는 것을 봤다. 벽난로에는 격조있고 무거워 보이는 긴 불쏘시개가 있었다. 그 옆에는 골프채가 있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저 스틱에 맞을 일은 없을 거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목표자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했다.
“보아하니 아직 어린 나이 같은데,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왔어? 응? 그 나이에 벌써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함부로 들어오고 그러면 안 되지, 안 그래? 뭐하러 왔어? 도둑질 하러 왔어?”
목표자는 골프채를 잡아 들었다. 그는 움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목표자는 그 모습을 보고 어깨를 풀었다. 생각보다 만만한 상대인 것 같다고 판단한 것이다. 움직임에는 자신감이 깃들었다.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도둑질은 아니에요. 사장님이 오늘 여기 있는 줄 알고 왔어요. 성매매 하실 때는 여기서 비밀리에 하신다면서요.”
아는 사람은 아는 것 같지만. 그는 뒷말을 삼켰다. 목표자가 선량한 사람이 아니란 게 그나마의 위안이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쉽게도 다 찍혀버렸네요. 내일 아침이면 언론에 쫙 퍼질 거예요. 놀라실까봐 미리 알려드리는 거예요.”
“어! 야!! 잠깐만!!”
자그만 달빛에도 날카로운 빛을 내는 골프채가 무색하게 목표자는 얼빠진 얼굴을 했다. 뒤통수를 사정없이 얻어맞은 표정으로 그에게로 다가갔다.
“잠깐만, 얼마를 원해?! 얼마면 되겠어?!”
목표자가 점점 거리를 좁히자 그는 “문을 열었다”.
목표자는 그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를 쫓아왔고 그는 점점 더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아예 등을 돌리고 뛰어가기 시작했다.
“야! 잠깐만!!”
중년 남자가 자신을 쫓아올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는 목표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휴대폰 불빛을 비추며 달려갔다. 그게 그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다.
“야!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숨이 차는지 목표자의 숨소리며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뿐만 아니었다. 뭔가 이상을 느끼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이제야! 그는 목표자의 아둔함에 혀를 찼다.
“야, 이상하잖아!! 어디야!!... 여기 어디야!! 야, 빨리 말해!!”
목표자가 계속 그를 쫓아 달리며 소리쳤다. 그는 뚱뚱한 중년 남성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계속 달렸다.
여기는 현실과 다른 공간이었다. 인간이 따로 불빛을 만들어 비추지 않는 한 빛 한 점 없는 곳이었고, 인간의 소음이 없는 곳이었다. 우주와 같은 침묵의 공간이었고 절대적인 어둠의 공간처럼 보였다. 그야말로 그렇게 오해되기 쉬운 공간이었다. 그러나 잘 들어보면 작은 소음들이 있었다. 멀리서 눈 먼 거인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있었고, 의미 없는 벼룩들이 움찔거리는 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더할나위 없는 평화로운 어둠의 공간이었다. 거의 무(無)에 가까운 공간이었다. 거기서 그는 그 이외에 유일하게 살아있는 “인간”과 술래잡기 중이었다. 심지어 그 인간은 “어머니”가 죽이라고 지시한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목표자는 그의 계획에 완벽히 걸려들었고, 목표자는 죽지 않았지만 마치 죽은 것처럼 바깥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게 될 것이었다. 그는 신이 났다.
목표자는 이미 지쳐 있었다. 다만 앞서 가는 자를 놓치면 이 이질적인 공간에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죽을 힘을 다해 쫓아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뜀박질에 여유가 생긴 탓에 이것저것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먼저는 그의 발걸음 따라 꽃이 피었다. 흙도 없는 곳에 꽃이 폈다. 그러다 가로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눈길이 닿는 곳에 불이 켜진 편의점도 만들어 올렸다. 그러고 나자 그는 도로를 만들었다. 상수리 나무를 규칙적인 배열로 만들어 올리고 나지막한 상가나 집들도 만들어 올렸다. 다만 밤이니까 불은 꺼뒀다. 그들은 어느 샌가 8차선 대로를 뛰고 있었다. ‘건축’이 여느 때보다 잘 이루어졌다. 마치 손꼽히는 명연주자들과 함께 공연하는 지휘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는 8차선 도로에서 작은 길로 들어섰다. 학교가 나타났다. 활짝 열린 밤의 교문을 지나 그들은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학교는 그의 선망이었다. 학교에서의 시간은 부드럽고 관대했다. 적절히 융화될 수 있었고 거기서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가능하면 그는 계속 학교에 있고 싶었다. 학교야말로 그의 안식처이자 도피처였다. 그에게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었던 유일한 곳이었다. 그리웠던 운동장, 현관, 그리웠던 신발장, 교실들, 그는 마치 조깅을 하듯 자신이 만든 학교를 음미했다.
그는 뒤를 쫓는 남자가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했다. 아직도 학교 정문을 막 지나고 있었다. 그는 거리가 벌어진 김에 달도 만들어 쏘아 올렸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남자는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는 배를 잡고 웃었다.
남자가 학교 안으로 들어오자 그는 1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중앙현관으로 올라오던 남자는 그가 우측 현관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괴성을 지르며 쫓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재빨리 내려와 뒷문으로 나왔다. 나오면서 문을 잠가둔 것은 덤이었다. 그는 통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울부짖는 목표자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은 안 죽었잖아요. 모든 것이 정리될 때까지 여기서 지내세요. 혹시라도 졸지 말고.”
목표자는 유리를 치며 울부짖었다. 그는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너무 시끄럽게 굴지 말아요. 눈 먼 거인들이 올지도 몰라요! 그들은 소음을 싫어하니까... 기껏 죽을 위기에서 구해준 생명 아깝게 버리지 말아요.”
그는 목표자를 학교 안에 버려두고 학교 밖으로 나가 다시 “문을 열었다.”
열린 곳은 목표자의 집 근처 도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슬픈 눈으로 목표자를 흘긋 본 후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목표자는 계속 욕설을 하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곧 그는 조용해졌다. 학교 안으로 누군가 들어와 그의 머리를 깨부쉈기 때문이었다.
뒷문엔 핏자국이 낭자하게 남았다. 그러나 닦아줄 사람은 없었다. 학교는 그저 다음 사람이 들어오길 기다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