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혹등고래도 죽음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녀도 깊은 바닷속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했다. 다만 가족들이 그녀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가족들에게 죽음을 보이기 싫어 무리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왔던 것이었다. 의식이 멀어지던 순간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이렇게 무섭고 힙들 줄 알았다면 차라리 가족들을 붙잡고 함께할 것을 그랬다는 후회와 이렇게 힘들어 하는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공존했다. 그래서 그녀는 토끼의 슬픔과 고통을 이해했다.
“가족에게 복수하고 싶어?”
밤혹등고래가 물었다.
“잘 모르겠어.”
토끼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고 싶어?”
밤혹등고래가 물었다.
“모르겠어. 나는 내가 원하는 때와 원하는 곳을 선택해본 적이 없어. 언제나 그애가 날 데리고 다니는 대로, 날 배치한 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나는 내가 어디에 있고 싶은지도 몰라. 먹고 싸고 자고 빈둥거리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뭘 할 수 있는지도 몰라.”
토끼는 말했다.
“그애는 내가 죽기 전날 밤에 눈물을 흘리며 “죽은 후엔 젊은 시절로 돌아가 건강하고 자유로워져라.”라고 말했어. 그애는 내가 움직일 수 없게 된 이후에나 내 주변에 둘러쳤던 울타리를 걷었어. 그리고 나는 죽었지만 여전히 어디에도 가지 못한 채 어디로도 갈 수 없는 앙상한 다리를 하고, 배에는 무겁고 거대한 암덩어리를 달고 있어.”
토끼의 귀가 뒤로 쳐졌다. 밤혹등고래는 토끼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복수를 하고 싶어?”
그녀는 다시 물었다.
“잘 모르겠어.. 발을 굴리고 잠을 방해하는 건 그냥 화풀이일 뿐, 복수를 하고 싶은 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어. 어쩌면 갈 수 있는 곳도 할 수 있는 것도 생각나지 않아서 이러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
토끼가 대답했다.
“그럼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
밤혹등고래가 물었다. 토끼는 귀를 쫑긋거리며 그녀의 한쪽 눈을 바라보았다.
“어디로 가는데?”
밤혹등고래의 눈이 인자한 웃음기를 머금었다. 그녀의 눈은 마치 별빛처럼 깊고 아름다웠다.
“우리 혹등고래들에게 구전(口傳)되는 천국으로 가는 중이야. 저 하늘 깊숙이 날아 은하수에 다다르면 흐드러지는 별빛 사이로 천국에 이르는 입구가 보인대. 미역과 산호, 잔디와 억새, 엉겅퀴를 엮은 입구 너머엔 가족과 친구들이 우리를 마중나와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언제나 따뜻하고 배고프지 않고 행복하며 건강하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곳이라고 해.”
토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는 혹등고래들만의 천국이 아니야?”
밤혹등고래는 웃었다.
“아니야, 거기엔 물속 생물도 육지 생물도 같이 있어.”
“그러면 토끼도 있어?”
“이전에 토끼와 함께 올라간 거북이가 있다고 들었어.”
토끼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끼 역시 아파트 옥상에서 홀로 발을 구르는 시간을 더이상 보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걸을 수 없는데 같이 갈 수 있을까?”
토끼가 말하자 밤혹등고래가 거대한 지느러미를 토끼 앞에 내밀었다.
“내가 태워줄게. 내 위에 타렴. 같이 가자.”
토끼는 밤혹등고래의 지느러미 위에 올라탔다. 그러자 밤혹등고래가 토끼를 자신의 등 위로 얹었다. 토끼는 한쪽으로 쏠린 커다란 종양을 끌어안고 죽기 직전의 모습처럼 옆으로 누웠다. 그는 죽기 전 5개월간 종양 때문에 늘 한쪽 방향으로만 누워있어 얼굴의 비대칭이 심했다. 그래도 그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그 그윽한 눈에 비친 달은 휘엉청 밝고 둥그런 달이었다. 다른 아파트들 너머로 산그림자가 솟아 있었다. 토끼는 하얀 눈물을 흘렸다.
“다른 데 잠깐 들렀다 가도 돼?”
토끼가 물었다. 밤혹등고래는 어디로 가고 싶냐고 물었다.
“북한산. 그애는 북한산이라고 했어. 낮이라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내가 움직일 수 없을 때 날 맑은 날이면 옥상으로 안고 올라와 건물들 사이로 북한산 꼭대기를 보여줬어. 나는 거기가 어떤 곳인지 가까이서 보고 싶어.”
“그래, 그럼 가 보자.”
“강도, 이 아파트에 있을 때 창으로 강을 매일 바라봤어. 거기도 가 보자!”
“그래, 어려울 것 없지! 우리는 자유로우니까! 거기도 가 보자!”
밤혹등고래는 꼬리를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몸이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다. 시원한 밤바람이 뺨을 쓸었다. 밤혹등고래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멀리 보이던 달이 그 크고 밝은 얼굴을 그들에게 들이밀었다. 하늘 가득 흩뿌려진 별들이 그들의 길을 밝혔다. 토끼는 잘 보인느 한쪽 눈으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일찌기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