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던 데서 조금 추가됩니다.
새로 쓴 부분 공미포11761자
츠무기는 며칠 전에 만난 외할아버지의 말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대충 자신에게 우호적이고 애정어린 말을 했던 것 같았지만 거기에 애정은 없었다. 텅 빈 말이었다. 그러나 어째선지 그 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이 외가의 피를 이은 정통한 자식이었댔던가 외할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다든가 어머니는 여자고 행실이 불량해서 그럴 수 없다든가 츠무기를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렀다든가.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문맥이 잘 이어지지도 않았거니와 자신에게 사랑과 승계를 말하면서도 어머니를 까내리는 것도 그랬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도 계속 생각하게 되는 것은 무슨 영문에서인지 몰랐다. 생각을 멈추고 싶었다. 간절하게. 더이상 생각이 자신을 좀먹지 않도록.
병원 정문을 지나면서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반장으로서 선생님께 부탁받은 일을 완수하러 가는 길이었다. 자신은 부탁받은 일을 완수하는 것에 집중하기만 하면 됐다. 어차피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든 자신이 바꿀 수 있는 건 없었다. 차라리 생각을 포기하고 시키는 대로나 하고 지금을 즐기는 게 현명한 길이었다. 책가방 속에 든 오늘의 읽을 거리를 생각하며 머릿속을 정리했다.
병실에 도착하자 만나야 할 사람이 보였다. 다인실이어서인지 침대에 앉아있거나 주변을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가 어디에 있는지는 들어가자마자 알 수 있었다. 창밖을 내다보며 노래를 부르는 뒷모습은 아직 가냘프고 어딘가 위태해 보였지만 이상하게도 사람의 눈길을 끄는 힘이 있었다. 츠무기는 그에게 걸어갔다. 노랫소리도 뒷모습도 츠무기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희한한 일이었다. 학교에 있을 때도 그가 이렇게 시선을 끌었던가?
“기분이 아주 좋아 보이네요, 에이치 군♪”
“응? 으음, 으으으음... 넌 누구지?”
“너무해!? 잊지 말아주세요, 같은 반의 아오바예요!”
“아아... 아오비 츠무기 군, 맞지? 소박하지만 울림이 예쁜 이름이네.”
그, 텐쇼인 에이치의 맑은 얼굴이 작게 미소지었다. 마치 천사 같은 얼굴이었다. 츠무기도 웃었다. 마치 텅 빈 것 같은 자아로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조금씩 흘렸다. 꽤나 무거운 이야기라 여겼는지 에이치는 ‘의외로 이상한 애’라고 말했다. 츠무기는 조금 들뜨는 기분을 느꼈다. 그가 자신을 “행복의 파랑새”라고 명명했을 때는 아마 좀 더 그랬을 것이었다. 반장으로서 돌볼 보람이 있는 애였다. 그랬달까, 인상이 좋았다. 이름을 외워주진 못 했지만 그는 몸이 약해서 학교를 거의 나오지 못 했으니까. 오히려 건강해서 매일 학교에 나올 수 있었던 츠무기 자신이 그를 발견하지 못 했던 게 이상할 정도였다. 츠무기는 그에게 끌렸다. 분명 그와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후 다시 만난 건 시일이 조금 지나 학교에서였다. 에이치가 팔목에 ‘에이치군 게이지’를 달고 있었다. 츠무기는 그가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그러나 그보다도 외할아버지가 다시 자신을 찾기 시작한 게 문제였다. 그는 저녁 8시쯤 되면 전화를 했다. 어머니를 버리고 자신에게 오라. 요지는 언제나 그것이었다. 츠무기는 거절했다. 외할아버지는 끈질겼다. 매일 저녁 8시마다 전화가 와서, 그 시간대엔 아예 전화기를 꺼놓고 있을 지경이었다. 소음 문제도 있었다. 최근 어머니가 어디서 돈을 빌렸는지 빚쟁이가 찾아와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는데, 그 시간대가 딱 7~9시 사이였다. 가족들은 냉장고 같은 기본 설비를 제외한 모든 전기를 꺼놓고 없는 척 숨을 죽였다. 그때 전화기가 울리면 그런 가족들의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될 수 있었다. 정말 곤란한 일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턱밑에 들이밀며 당장 태도를 결정하라고 윽박지르고 거절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고 원하는 답을 얻을 때까지 매일마다 스토킹을 해대는 일은. 재미있는 일이었다. 남들은 당연한 듯 누리는 것들을 누리지 못 하고 숨죽이며 살면서도 거기서 벗어나게 해준다는 외할아버지의 손은 적극 거부하는 것이. 피가 전혀 이어지지 않았는데도 외할아버지의 얼굴에서 친아버지의 얼굴을 찾아내고 마는 것이. 목소리에서 그 때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
어느 날은 전화가 쉬는 시간에 울렸다. 외할아버지의 번호였다. 츠무기는 전화를 무시하고 가방 안에 넣었다. 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렸다. 옆에 있던 반 친구들이 츠무기의 가방과 츠무기의 얼굴을 번갈아 볼 정도였다. 츠무기는 시선에 당황해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거절했다. 또다시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고, 그는 전화기의 전원을 아예 꺼버렸다.
“무슨 전화야?”
오오타가 그에게 물었다.
“아하하.. 요즘 장난전화가 자꾸 와요. 받아도 영문을 알 수 없는 얘기만 무섭게 해서 무시하고 있어요.”
“변태 아냐? 다음에 전화가 오면 날 바꿔줘. 욕지거리를 해서 다시는 못 하도록 해야지! 아니면 내가 지금 전화 걸어줄까? 전화기 줘봐.”
오오타는 츠무기의 전화를 빼앗으려 했다. 츠무기는 전화기를 재빨리 바지 주머니에 넣고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요, 나도 남자니까요! 내 몸은 내가 지킬 수 있답니다. 체력에도 자신이 있고요.”
츠무기의 말에 친구는 손을 거둬들였다. 그러나 얼굴엔 찝찝함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 말한다면야 냅두겠지만... 상대가 이상한 걸 요구하면 큰 소리로 명확하게 거절하고 도망쳐. 장기 같은 거 털리지 말고.”
오오타는 츠무기의 정수리를 헝클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츠무기는 갈퀴손으로 머리를 정리하고선 다음 시간 교재를 책상 위로 꺼냈다. 행동하는 내내 왼쪽 얼굴에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에이치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츠무기는 뜨끔했다. 마치 마음 한 켠이 불에 데인 것처럼 화들짝 놀라 어색하게 시선을 회피했다. 가슴은 불안하게 두방망이 쳤다.
수업이 마치자 에이치가 다가왔다. 츠무기는 평소처럼 인사를 나누고 혼자 도서실로 향하려 했었다. 그러나 에이치는 귀가하지 않고 그를 따라 도서실로 향했다. 츠무기는 언제 그가 예의 전화 얘기를 할지 몰라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에이치는 도서 정리를 도와주는 동안에도 그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저 요즘 누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여러가지 학교 이야기를 묻고 답한 것이 전부였다.
해가 지고 하교할 시간이 되어 에이치가 이윽고 그 화제를 꺼냈다.
“곤란한 일이 있다면 얼마든지 날 이용해도 돼.”
그가 꺼낸 말은 의외였다. 어떤 사정인가를 캐물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에이치는 해결방법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일이라면 말하지 않아도 돼. 구체적인 사정을 몰라도, 내가 돈을 쓰거나 직접 행동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도움은 줄 수 있어. 그저 이름을 파는 것만으로도. 혹은 무언가를 가볍게 지시하는 것만으로도, 혹은 내가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껄끄러운 일들이 해결되기도 해.”
담담하게 말하는 에이치의 옆얼굴을 츠무기는 바라보았다.
“그 일에 있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는 네 편일 테니까 마음 편하게 네가 가진 걸 이용하면 돼. 그 정도 비용은 얼마든지 부담할 수 있어.”
츠무기는 웃었다.
“그 말은 우리가 친구란 얘기죠?”
에이치 역시 가볍게 웃었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창으로 비치는 달빛에 츠무기는 설렘을 느꼈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같은 편이 되어주겠다는 말 때문인지 그의 아름다움 때문인지는 츠무기도 알 수 없었다. 다만 이상하게 용기를 주는 말이었다. 어쩌면 뭐든 정말로 해낼 수 있을 만큼 재력과 힘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상관 없었다. 복도를 함께 걷는 동안 어깨를 나란히 하자 에이치에게서 나는 은은한 향이 전에 없이 의식되었다. 원인이 무엇이었든 츠무기는 에이치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잘가요. 좋은 밤 되길.”
“그래, 츠무기. 내일부터는 전화가 울리지 않길 바라. 널 위해서도, 날 위해서도. 계속 전화를 꺼놔선 필요할 때 통화도 못 하게 되니까.”
에이치는 교문 앞에 정차한 리무진에 올라 탔다. 문이 닫히자 검고 긴 리무진은 소리도 없이 어둠 속을 미끄러져 갔다. 츠무기는 리무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필요할 때 통화도 못 하게 되니까.” 에이치의 목소리가 재생되었다. 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전원이 꺼진, 검은 액정이 반짝였다. 이 설렘은 자신만의 것일까 궁금했다. 집까지 가는 동안 전화를 해주면 좋으련만. 하지만 에이치가 전화를 걸어준다 해도 지금은 받을 수 없었다. 전화를 켜면 분명 에이치보다도 먼저 외할아버지가 먼저 전화를 걸어올 터였다. 츠무기는 전화기를 켜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주머니 안에 넣었다. 하지만 언젠가, 가까운 시일 내에는 외할아버지와의 일을 해결하고 그와 수화기 너머로도 대화를 하고 싶었다. 부디, 가까운 시일 내에.
떠들썩한 교실에서 책이 날아다녔다. 게임 잡지였다. 아이들은 웃으며 아무렇게나 책을 집어던졌고, 받은 아이는 페이지를 펼쳐보고는 “야, 이런 애냐!”라며 도로 잡지를 던졌다. 누군가는 캐릭터 이름을 외쳤고, 다른 히로인의 이름도 누군가가 외쳤다. 도서위원으로, 책을 소중히 다루는 게 습관이 된 츠무기는 약간 조마조마함을 느꼈다. 책이 언제 찢어질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자신의 책은 아니었지만.
“야, 걔가 뭐가 좋아, 창녀인데!”
오오타가 외쳤다. 츠무기는 놀라서 오오타를 올려다 봤다. 산뜻하게 생겨선 그런 단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올리는 게 이상했다. 아무리 남자들만 있는 교실이라 해도 그랬다.
“야, 걔 좋아하는 팬들이 있다. 팬들한테 사과해.”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그런 말을 했다.
“그것도 모에 포인트인 거 모르냐?”
다른 누군가는 그런 말을 했다.
“오빠한테 강간당한 거랑 창녀랑 무슨 상관이 있냐? 말 참 더럽게 하네.”
다른 누군가는 그런 말을 했다.
“애당초 강간은 왜 당하냐? 한 놈도 나쁘지만 당한 년은 멍청하고 더러워.”
오오타가 외쳤다. 그는 자신만만해 보였다. 늘 자신만만한 애긴 했다. 외할아버지에게서 온 전화를 자기가 받아서 욕지거리를 해주겠다던 그 태도와도 잘 연결이 되는 일관적인 모습이긴 했다.
“텔레비전에 나가는 새끼가 할 말이냐? 미친놈”
누군가 그를 비난했다. 그러자 그는 발끈했다.
“야, 나만이 아니야! 그거 게임 처음 나왔을 때 걔 아다 아니라고 게임 시디 깨고 버리고 난리도 아니었단 건 아냐? 걘 주인공 자격이 없는 거야. 다들 싫어해서 찢고 깨고 인증했는데 왜 나만 못된 놈인 것처럼 말해?”
오오타의 말에 츠무기는 그가 들고 있던 페이지에 새겨진 소녀의 얼굴을 봤다. 가만 기억을 떠올려 보자 어렸을 때 그녀의 얼굴의 파편을 어딘가에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츠무기는 뜨끔했다. 확실히 오오타 혼자만이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 캐릭터에 대해 얘기하며 열을 올리다 “그런 것 때문에 애들끼리 싸우냐”는 중재에 입을 다물고 앉았다. 확실히 그랬다. 그녀는 실존하는 인물도 아니었고 가족에게 강간당하는 건 그들에겐 거의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그러니 굳이 그 일로 열을 올려 싸우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츠무기는 그저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 끝낼 수는 없었다. 만약 자신의 과거가 밝혀지면 어떤 식으로 그들은 자신을 대할까? 멍청하고 더러운 창남이 될까, 모에 포인트를 가진 캐릭터가 될까, 아니면 주변 사람들이 사과를 받게끔 만드는 존재가 될까? 그렇다면 오오타는 자신의 친구란 이유로 아오바 츠무기를 비난한 누군가에게 사과를 받게 될까? 아니면 자신은 남성이기에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런 여성은? 거기서 츠무기의 머릿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으나 곧바로 지웠다. 생각해선 안 될 일이었다. 아직은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그는 생각을 다시 포기했다. 어차피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수업이 시작되면 이 이야기는 또 당장의 과업에 밀려 기억의 뒤편으로 내던져질 것이었다. 무엇을 말해도, 무엇을 생각해도, 그렇게 심각할 이유는 없었다. 이제 죽음을 제외하곤 그를 상처입힐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을 터였다.
그날부터 츠무기는 학교 활동에 더 열을 올렸다. 수예부에 가서 이츠키 슈와 차를 마시며옷을 만들고, 도서실에 가선 밤늦게까지 빠진 책은 없는지 수선이 필요한 책은 없는지 챙기고 배치를 확인했다. 전화기는 꺼 놓은 상태였다. 어차피 집에서 전화가 올 일도 없었다. 가끔 레이가 불러 달래기도 하고 을르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에이치와는 이전보다 대화가 줄었다. 그는 에이치의 얼굴을 볼 때마다 자신의 ‘자격’을 생각했다. 밤이 되면 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나오는 꿈을 꿨다.다. 자고 일어나면 묘하게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에이치가 오오타와 교실에서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되었다. 츠무기는 그럴 때마다 자신의 ‘자격’을 생각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번엔 외할아버지가 아예 집으로 가는 길목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집에 늦게 돌아가기 시작한 지 3주쯤 되던 때였다. 전화기를 꺼놓고 지냈기 때문인 듯했다. 그는 다짜고짜 츠무기의 손목을 잡고 집으로 함께 돌아가자고 반쯤 윽박지르듯 말했다. 츠무기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달리기 시작했다. 자신을 지배하고 움직이는 감정을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류의 공포 같기도 했고 혼란 같기도 했다. 떠오르는 얼굴은 둘이었다. 아름다운 친구와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그들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츠무기는 외할아버지를 떨치고자 친구와 어머니의 얼굴을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집 앞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츠무기는 진작에 외할아버지를 떨쳐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뒤를 돌아봐도 그의 흔적도 없었고 잡혔던 손목도 멀쩡했다. 옅은 손자국이 남아 있긴 했지만 내일이 되면 사라질 정도였다. 오늘은 이거면 됐다. 내일은 다른 길을 선택해야겠단 생각을 하며 츠무기는 현관문을 열었다.
오오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수면부족인지 다크서클이 심해지고 피부도 거칠어졌다. 보통의 남고생이라면 게임이라도 하느라 그럴 수 있겠지만, 아이돌 지망생쯤 되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최근 텔레비전 프로그램 일을 하나 받아서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때문인지 학교도 어젠 빠졌었다. 일이 많이 바쁜 걸까, 스트레스가 심한 걸까. 츠무기는 그가 걱정되었다. 자리도 근처였고 자신은 반장이기도 했으니까. 오오타 역시 그를 걱정해준 적이 있었다. 그냥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그는 오오타의 팔을 잡았다.
“오오타 군”
“ㅎ...ㅣㄱ”
오오타는 조금 기묘한 소리를 내며 그에게서 팔을 빼냈다. 그는 놀란 얼굴로 츠무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츠무기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고 있자 오오타는 어색한 얼굴로 팔을 털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평소 답지 않게 너무 놀라는데요?”
“아무 일도 없어! 갑자기 뒤에서 잡으니까 놀라는 게 당연하지!”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꾸미려 노력하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은 계속 실패하고 있었다. 낭패감과 불안감 사이 어딘가에 있을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얼굴로 드러나 있었다. 츠무기는 재차 물었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나요? 얼굴이 많이 안 좋아요.”
“아니,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니깐...!”
“오오타”
다소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던 에이치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몸을 움찔거렸다. 마치 거스를 수 없는 절대자의 목소리를 들은 듯 그의 자세는 완전히 경직되었다.
“수업 마치고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에이치는 부드럽고 조용히 말했다. 오오타는 우물거렸다. 츠무기는 오오타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친구 사이에 그럴 이유는 없을 터였다.
“알았어.”
한참을 망설이던 오오타는 결국 긍정의 대답을 내놓았다.
“저도 거기 껴도 될까요? 걱정이 되네요.”
“잠깐, 너는 안 와도...”
“그래, 츠무기도 와. 같이 듣는 게 좋겠지.”
에이치가 오오타의 거부 의사를 가볍게 묵살하고 츠무기를 받아들였다. 오오타는 마치 약점이라도 잡힌 듯 이를 악 물고 에이치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츠무기는 사뭇 이상하다는 듯 둘을 바라보았다. 오오타의 못마땅해 하는 얼굴을 보며 잠깐 빠져주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을 했지만, 만약 자신의 경애하는 친구가 오오타를 괴롭히고 있다면, 둘 모두의 친구로서 중재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결론지으며 에이치의 호의를 아무말 없이 받아들였다.
수업이 마치고 에이치와 오오타와 츠무기는 좁다란 보컬 레슨실에 모였다. 딱히 레슨을 할 건 아니었다. 방음시설이 되어 있고 다른 사람들이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에이치가 손을 쓴 것이었다. 츠무기는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가 오갈 예정이기에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가 했지만, 에이치는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리며 일상적인 얘기를 조금씩 물었다. TV 프로그램 활동은 어때? 관계자들은 어때? 오오타는 짤막하게 괜찮아, 좋아, 같은 대답을 무성의하게 내놓았다. 평소 같았으면 어떤 식으로 활동해야 할지 관계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처세술에 대해 긴 이야기를 늘어놓았겠지만 오늘은 에이치가 유난히 조용했다. 츠무기는 둘의 대화를 지켜보았다.
“그때 네게 연결시켜준 프로듀서,”
“......!”
오오타의 방송 프로그램은 아무래도 에이치가 연결시켜준 모양이었다. 아마도 그에게서 특별한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겠지. 분명, 적어도 츠무기 자신보다는 오오타 쪽이 더 반짝이고 있어 보였다.
“내가 경고했던 일이 일어난 거야?”
에이치가 오오타에게 질문했다. 오오타는 잠시 침묵했다. 그 사이 에이치의 손가락은 느리게 건반을 하나씩 눌렀다.
“아니야.”
오오타가 대답할 때까지 에이치는 건반을 다섯 번 눌렀다. 츠무기는 눈을 깜박였다.
“저, 대화를 따라잡질 못 하겠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츠무기의 질문에 에이치는 한숨을 쉬었다.
“내 실수에 관한 얘기야, 츠무기. 나의 나이 때문에, 누군가를 조사할 때 굳이 그의 성벽에 관해선 애송이에게 들려줄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 판단해서 보고를 누락시켜버리는 성인인 사용인들이 있었고, 그걸 고려치 못하고 함부로 사람을 연결시켜버린 내 실수에 관한.”
“아...”
“불과 이틀 전에야 그 녀석이 우리 또래의 남자애들, 특히 아이돌 지망생들을 ‘좋아’한단 얘기를 들을 수 있었지. 말이란 참 재미있어. ‘좋아한다’니, 일을 빌미삼아 약자의 성을 착취하는 것을 그런 긍정적인 단어로 포장한 것은 사람들이 강자인 가해자에 이입하기 때문일까? 대부분은 강자가 아닌데도 말이지. 그런 의미에서 아직 입지를 다지지 못한 우리 신인 아이돌들은 방송계에서 약자야. 여성 아이돌들에 비하자면야 낫긴 하겠지만, 결코 안전하다 할 수는 없어. 추행이나 강간은 대체로 권력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범죄야. 범행 대상자의 성별따위 알 바 아니지. 그래서 아직 미성년에 입지도 제대로 다지지 못한 남자 아이돌들도 누군가의 권력을 확인시켜주기 위한 도구로 다뤄질 가능성이 충분해. 이런 얘길 이틀 전 너에게 보내지 않았나? 그땐 분명 자신만만하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 했었지?”
에이치가 오오타를 쳐다봤다. 오오타는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외면했다. 어깨는 떨리고 있었다. 꽉 쥔 주먹엔 혈관이 튀어나와 있었다.
“그래서 어쩌란 거야? 네 말대로 우리는, 나는 입지를 다져야만 했어. 미래를 틀어쥐고 있는 사람한테 어쩌란 거야? 일을 포기하고 미리 꽁무니를 빼야만 했단 거야?”
오오타의 목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에이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피해를 당한 거야?”
“아니야!!”
에이치의 질문에 오오타는 강한 부정의 말을 내뱉았다.
“나는 남자야! 그런 거 당할 일도 없고 당하지도 않았어! 그건 그런 게 아니야! 나는 그런 게 아니야!”
츠무기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자신도 그때 아버지가 자신에게 뭘 하고 있는지 몰랐었다. 아이들이 웃고 떠들며 주고받던 이야기 속에서,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이야기 속에서 유추해낼 수 있는 범위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온몸이 얼어붙는 두려움과 혼란과 고통과 누군가 자신을 구제해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과 모든 것이 꺾여나가는 듯한 무력감이 자신을 지배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혼자 멋대로 만족하고 성기를 빼낸 다음에는 지독한 혐오감과 비참함이 몰려왔었다.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중에도 그때의 감각이 울컥 되살아날 때면 한참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온몸을 끌어안고 자신을 진정시켜야만 했었다.
초등학생인 주제에 야동에 중독된 아이도 있었다. 걘 여자는 강간해줘야 한다면서 반에서 야동 흉내를 내며 신음성을 흘리곤 했다. 남자는 강간을 하는 존재, 여자는 강간을 당하는 존재라 단언했다. 츠무기는 그럼 자신의 존재는 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자신은 여자 취급을 받은 것일까? 그렇다면 여자는 그런 취급을 받는 존재인가? 어머니는 그런 일을 당하기 위한 존재인가? 자신은 아직 남성적인 특징이 나타나지 않았고 힘도 약하니 그런 취급을 당해도 되는 것인가? 자신이 당한 것은 무엇인가? 강간인가? 아닌가? 형은 아버지가 아닌 자신을 매도하며 폭행했다. 방심하면 어디서든 의도 없는 비난이 날아들었다. 괴로웠다. 밤이 되어 혼자가 되면 이불을 뒤집어 쓰고 울었다. 빨리 어머니가 돌아오길 기도했었다. 그리고 이 과거만은 어딘가 고장나버린 지금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다른 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었음에도.
“널 흠집내려고 묻는 게 아니란 걸 알아줬으면 좋겠네. 오히려 그 반대야. 네가 피해를 당했다면 지원을 해주겠다고 얘기하는 거야.”
에이치의 말에 오오타는 입술을 깨물었다. 눈가가 발개진 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그는 마찬가지로 빨개진 콧잔등을 주먹으로 문질렀다.
“나는... 나는 지원 대상이 아니야. 나는 그런 그런 사람이 아니야.”
“어라, 오오타 군, 아직도 강간 당한 쪽이 멍청하고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츠무기는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순수한 의문이었다. 아니, 어쩌면 약간은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렸을 때 자신은 얼마나 간절히 도움을 원했던가.
“무섭고 화가 나겠죠. 밤마다 꿈을 꿀지도 몰라요. 매일 잠도 못 자고 상대를 원망하다 결국 자기혐오로 빠지는 자가당착을 되풀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어디까지나 오오타 군이 피해를 당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지만요. 오해했다면 미안해요. 하지만 정말로 피해를 입었다면 에이치 군의 도움을 받는 게 좋을 거예요. 오오타 군에게도...... 인간답게 살 권리는 있어요.”
그는 아직 괴로워하고 울 수 있었다. 늦지 않았다. 자신처럼 망가지기 전에 그는 다시 행복을 찾을 수 있길 츠무기는 바랐다. 오오타는 그런 츠무기의 얼굴을 올려다 봤다.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그의 얼굴에 감기는 묘한 감정을 츠무기에겐 뭐라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그저 고통이라곤 느끼지 못 하는 심장으로라도 고통받는 그를 감싸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매장이야... 끝장이야. 여기까지 오는 데만도 돈이 엄청나게 들었어. 엄마도 아빠도 나만 보고 있단 말이야! 내가... 내가 강간... 당한 걸 공론화 시키면 엄마아빠도 절망할 거야! 여태까지 들이부은 돈은 허사가 되고 아이돌로서의 내 꿈도 희망도 끝나버릴 거야! 운 좋게 그 피디는 퇴출시킨다 해도 그 피디의 친구들이 내가 방송생활을 이어가도록 가만 두지 않을 거야! 사람들도 내가 TV에 나오는 것도 싫어하겠지! 그들은 피해자를 싫어해!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평화를 깨뜨린 우울한 얼굴이라고 생각하겠지. 그러면 나는... 엄마 아빠도 친척들도 볼 낯이 없어... 하지만 내가 참고 버티면서 피디와 둘이 될 상황을 잘만 피하면... 어떻게든...”
말하며 오오타는 츠무기의 소매를 붙잡고 울었다. 온 얼굴 가득 눈물을 흘리며 인내를 말했다.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에이치였지만 시선은 완전히 츠무기의 얼굴을 향하고 있었다. 츠무기는 그의 등을 쓰다듬었다. 에이치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하면 녀석은 다른 희생양을 찾겠지. 방치했다간 100명이고 200명이고 희생자는 늘어날 것이고, 그런 녀석 같은 가해자의 숫자도 계속 늘어날 거야. 자정하려면 도려내야만 하는 부분도 있어. 네가 그를 요령좋게 피한다 하더라도 범행을 묵인받은 가해자는 또다시 다른 약자를 찾아 범행을 저지르게 돼. 결국 너의 꿈을 지키고자 하는 행동이 네 또래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거야. 누군가 피해를 호소해도 다른 전례가 없으니 피해자만 거짓말쟁이가 되어 묻히고 녀석은 범행을 멈추지 않을 거야.”
“오오타 군의 책임인 것처럼 말하지 말아요, 에이치 군.”
츠무기가 에이치의 말을 끊었다. 에이치는 입을 다물고 시선으로 오오타의 얼굴을 훑었다.
“혼자 감당하라고는 말하지 않을게. 어차피 네가 처음이 아닐 거야. 사람을 써서 조사해 다른 피해자들을 찾아내 함께 하도록 종용할 거야. 변호인단도 지원해 주지. 물론 네가 강간이나 추행이나 성희롱을 당했다고 말했을 때의 얘기야. 아니라면 무시하면 돼. 언제든 전화로든 라인으로든 얘기해줘.”
에이치는 말을 끝내곤 다시 피아노 건반을 눌렀다. 몇 개인가 음을 눌러 조율이 잘 되어 있는지 확인한 후 열 손가락 모두를 건반 위에 올렸다.
“이제 그만 가도 좋아.”
그리고 그는 단순한 선율의 피아노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오오타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냈다. 콧물까지 슥슥 닦아내고선 퉁고 붓고 빨개진 눈으로 에이치를 쳐다봤다.
“내일까진 연락할게.”
그리고 그는 방을 나갔다. 츠무기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레슨실에선 그렇게 울었는데도 걸음걸이는 의외로 바른 걸음걸이였다. 그는 분명 상처받았지만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상냥하네요, 에이치 군.”
츠무기는 시선을 다시 에이치 쪽으로 돌렸다. 에이치는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나는 아이돌이란 문화를, 아이돌 그 자체를 사랑하는 거야. 우리 역시 이 학원을 벗어나면 방송계에서 일하게 되겠지. 그런 의미에서 일터인 방송계 쪽을 봐둘 사람이 필요했던 거야. 내가 직접 가선 아무런 의미 없이 대접이나 받다 오겠지. 그래서 굳이 적당히 작은 자리에 적당히 잘하는 오오타를 보냈던 거였는데... 이런 일이 될 줄은 몰랐어. 이런 것 하나 예상 못 하다니, 내 불찰이야.”
에이치의 왼손이 시 음을 눌렀다가 건반에서 아예 떨어졌다. 양손을 아래로 내렸다가 다시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 사건을 이용해 연관된 가해자들을 뿌리 뽑을 생각이야. 어쩌면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얽혀 나올지도 모르지. 캐 봐야 알 수 있는 일이야. 어쩌면 우리도 타격을 조금은 입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얼마나 타격을 입든, 가급적이면 이 일로 방송관계자들의 성착취를 근절시킬 수 있으면 좋겠어. 완전히는 무리겠지만 그런 ‘분위기’는 만들어낼 수 있겠지.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오오타의 인정이 필요해. 모든 작업의 시작은 오오타 자신이 스스로 당한 일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될 거야. 그게 없으면 텐쇼인 가의 원조도, 변호인단도 아무 소용이 없을 거야.”
“네...”
“그리고 다정한 건 너야. 오늘 오오타가 거의 자신의 피해를 인정하기 직전까지 간 건 네가 있어서야, 츠무기.”
“네? 아니, 그럴 리가요. 에이치 군이 있었기 때문이겠죠.”
츠무기는 그렇게 말하곤 피아노에 손을 얹었다. 오오타가 만약 자신 때문에 피해를 말할 생각이 들었다면 그건 자신이 다정해서라기보다는 아마 동료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터였다. 일종의 전우애와 비슷한 것이었다.
일의 해결은 피해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데서 시작한다. 맞는 말이었다. 애당초 그것이 피해인지 아닌지 판단하고,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 확인한다. 그것이 얼마나 아프고 쓰리든, 어떤 좌절감을 안겨주든, 얼마나 더 자신을 혐오하게 만들든, 그것을 확인하는 것부터 먼저 해야만 했다. 그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부정하고 피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혼자서 해결하려 한다 해도 해결되지 않을 땐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도움을 받는다. 설령 그로인해 다른 아픔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그게 최종적으로는 스스로의 고통과 불편을 덜 수 있는 바른 방법이었다. 심리적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된 츠무기에게 그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적어도 핸드폰을 켤 수는 있게 될 것이다. 어둠 속에 숨어서라도 에이치와 라인으로 잡담을 나누고 웃을 수 있게 된다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가치가 있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는데도 츠무기는 왠지 모르게 위로 받았다. 에이치의 말에서, 단호함에서, 그의 행동에서 그랬다. 그리고 평소 츠무기의 언행처럼 가볍고 급작스럽게, 불현듯 생각난 듯이 외할아버지와의 일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솟아난 것이다.
“그보다 에이치 군,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수 있나요?”
츠무기가 묻자 에이치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글쎄, 내용에 따라 다르겠지. 하지만 최대한 들어주도록 할게. 너니까, 츠무기.”
츠무기는 마시던 물컵을 내려놓았다. 목재 테이블이 견고한 소리를 냈다. 패밀리 레스토랑의 웨이트리스가 비워진 만큼 물을 채우고 갔다. 맞은편에선 장년의 남자가 못마땅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장년 남자의 등 뒤 대각선 자리에는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짧은 머리에 근육이 착실히 잡힌 단단해 보이는 남자였다. 츠무기는 그를 향해 웃었다. 에이치에게 부탁해 함께 오게 된 경호원이었다.
“내 쪽으로 오면 빚쟁이에 쫓길 일도 밥 굶을 일도 없어! 새 옷도 많이 사주겠다는데 도대체 왜 안 오겠다는 거야? 느이 엄마가 너한테 도대체 무슨 세뇌를 했길래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거냐!”
장년의 남자, 츠무기의 외할아버지는 위압적으로 말했다. 츠무기는 한때 그가 다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내가 당신이 싫은 거예요.”
외할아버지는 화가 나 붉어진 눈으로 츠무기를 노려봤다. 나이가 들어 툭 튀어나온 눈은 금방이라도 노성을 지를 것 같았다.
“도대체 왜 그렇게 싫은 거냐?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그래? 느이 애미가 내가 나쁜 사람이라고 주입이라도 하디? 그년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 나랑 같이 살면 너도 알게 될 거야!”
“바로 그런 점이 싫은 거예요.”
츠무기는 즉답했다.
“받아들이는 데 오래 걸렸답니다. 당신이 저를 아들이라 말하고 있다는 걸요.”
외할아버지는 물을 들이켰다. 츠무기는 그가 컵을 다시 놓는 손동작을 응시했다. 자신의 손과 비슷하게 생긴 손이었다.
“나는 아픈 게 싫어요. 그래서 강간도 싫어요. 다른 사람이 아파하는 것도 싫어요. 특히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는 것은 더욱 싫답니다.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나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머니를 강간하고 나를 낳게 한 외할아버지를 싫어할 수밖에 없어요. 나는 외할아버지에게 가지 않아요. 그러니 더이상 연락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츠무기의 말에 외할아버지는 벌떡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그는 위협하려는 듯 테이블을 양손으로 세게 내려치곤 츠무기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강간이라니, 누가 강간을 해! 그건 강간이 아니야!! 느이 애미가 섹스 중독에 발랑 까져서나를 유혹하고 쑤셔달라고 얼마나 매달렸는지 알아?! 느이 애미는 원래 그런 년이야! 그런 데서 너 같은 아들을 낳았으니 내 씨가 좋았던 거지! 그러니 너는 잔말 말고 우리집에 와서 나랑 같이 살아!”
츠무기는 눈을 내리깔았다. 손가락은 물컵을 만지작거렸다.
“어머니가 그런 사람이라면 나도 그런 사람이겠죠. 그건 누구로부터 시작됐을까요?”
츠무기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는 마치 외할아버지가 모든 죄의 시작이라는 듯이 다시 시선을 들어 웃었다.
“내가 바로 당신의 죄의 증거예요. 다시 연락하거나 찾아오면 강간죄로 신고할 거예요.”
츠무기의 말에 외할아버지는 츠무기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뒤에 앉아 있던 경호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외할아버지는 노성을 질렀다.
“해봐!! 어디 한 번 해봐!! 느이 애미 빚 때문에 이걸로 경찰에 잡히면 사기죄로 감방에 들어갈 거다! 그리고 유혹에 넘어가 성인인 느이 애미랑 합의로 잔 나는 무고죄로 너도 쳐넣을 거다!! 어디 한 번 해봐!!”
그의 주먹이 츠무기의 옷자락을 조여 목을 조르고 있었다. 경호원이 달려와 그의 팔목을 잡았지만 아랑곳없었다. 결국 팔을 꺾어 얼굴을 테이블 위에 처박고서야 그는 츠무기를 놓아주었다.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며 경호원에게 넌 누구냐며 윽박지르고 있었다.
“에이치 군의 경호원이에요. 에이치 군은 내 친구고 대재벌의 후계자랍니다♪ 텐쇼인이라고 하면 알까요?”
외할아버지는 거짓말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목소리 볼륨이 점점 줄어들었다. 저항이 약해지자 경호원은 그의 팔목을 놓았다. 그는 얼굴이 빨개져선 잠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다간 “그 애미에 그 새끼!”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경호원과 츠무기는 잠시동안 패밀리 레스토랑을 찾은 손남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끼며 서 있었다.
“곧 음식이 나올 거예요. 같이 먹을래요?”
츠무기는 침착하게 다시 자리에 앉았다. 경호원은 아무 말도 없이 맞은 편에 앉았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마시던 물컵은 테이블 바깥쪽으로 내놨다. 컵을 옮기던 경호원의 얼굴과 손짓에 경멸이 감돌았다.
마침 음식이 얹힌 트레이를 끌고 웨이터가 다가왔다. 익숙한 손길로 물컵을 치우고 새로운 물과 식기세트를 세팅했다. 이제 막 완성된 음식을 테이블 위에 얹어놓고선 웨이터는 츠무기와 경호원의 얼굴을 슬쩍 훑었다. 츠무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포크와 나이프를 들어 자신 앞에 놓인 함박스테이크를 썰기 시작했다.
“중절해버렸으면, 중간에 버리기라도 했더라면 엄마는 편했을 텐데.”
자신을 볼 때마다 피해의 기억이, 증오스러운 아버지의 기억이 플래시백 되었을 텐데. 츠무기는 그 고통의 크기를 가늠해 보려다가 포기했다. 분명 자신도 죽을 것처럼 괴로웠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의 자신은 그때의 기억이 플래시백 되거나 아버지가 떠올라도 고통스럽지 않았다. 그저 금방 생각을 차단하는 걸로 끝냈다. 그래서 같은 경험을 했지만 그 고통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엄마가 덜 망가졌기 때문일 것이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태생부터 잘못된 자신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안고 있어준 어머니께 기도하듯 감사 인사를 했다. 츠무기는 경호원이 그런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는 것을 느꼈다.
“정말이지 에이치 군은 대단하네요. 정말 이름을 대는 것만으로도 외할아버지가 도망쳐버렸어요. 제가 존재를 걸고 협박을 했는데도 안 통한 사람인데...”
경호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츠무기는 해사하게 웃었다.
“에이치 군에게 전해주세요. 앞으로 무슨 일이든 함께하겠다고. 우린 정말로... 친구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