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미포 6509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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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그런 거 없다고 생각해왔잖아! 이제 그만 토끼는 잊어!”
니엔의 말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영진은 한 대 맞은 얼굴로 니엔의 얼굴을 쳐다봤다. 둘 사이에 날카로운 기류가 흘렀다. 이제 그만 토끼는 잊으라. 그 말이 함의한 전제를 영진은 잘 알고 있었다. 마루를 키우면서도 들은 말이었다. 토끼보다 인간이 중요하다. 토끼를 향한 너의 정은 인간과 인간이 맺는 것보다 훨씬 얄팍하다. 언젠가 너도 잊을 것이다. 짐승과 인간은 결코 같을 수 없다. 그렇기에 네가 상실한 것 역시 중요하지 않다. 네가 겪는 아픔 역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네가 복구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중요할 수 없다. 그것은 너의 유일한 가족이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법 자주 들었던 것 같은데도 들을 때마다 상처가 되는 말이었다. 영진은 몸을 떨었다.
“아... 저...”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낀 스페키가 말을 꺼냈다. 그 남자는 불편한 얼굴로 손가락을 서로 베베 꼬며 말했다.
“제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 방주가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스페키의 질문에 숨도 쉬기 힘들었던 팽팽한 긴장감에 균열이 생겼다. 덕분에 니엔은 한숨을 쉬며 손님용 차를 끓이러 갔고 영진은 간신히 비져나오려던 눈물을 수습했다.
“그렇잖아요. 영진 씨가 방주에 타려는 건 왜인지 알겠는데, 그거 알려는 사람이 전부 죽을 정도로 중요한 건가요, 그게?”
영진은 그렇게 물어오는 스페키를 보며 그 남자가 근본주의자였단 것을 다시 떠올렸다. 확실히 모르는 사람에겐 이게 어떤 건지 감이 잘 오지 않을 것이었다. 영진은 이마를 긁적였다. 자신의 입장을 전달하는 데도 이런 정리는 필요할 것 같이 느껴졌다. 영진은 부족하게나마 AI와 방주에 대해 설명하기로 했다.
방주란 4년에 한 번 AI들이 쏘아올리는 4년간의 문명의 총체와 같은 것이었다. 4년간 개발되었던 것들-특히 물질적인 것들, 있었던 사건들, 여론들, 결정된 정책들, 구체적인 방식들, 향후 나아갈 방향성, 사안을 판단하는데 쓰이는 로직까지 모두 실은 것이 방주였다. 거대한 문명의 집합체이자 데이터뱅크이자 기밀 덩어리였다. 이것이 만약 테러리스트들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규모로 악용될 수 있었다. 그야말로 4년간의 문명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설명한 타이밍에서 니엔이 돌아왔다. 그는 영진이 스페키에게 설명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영진은 입술이 마르는 것을 느끼며 다시 스페키에게 설명했다.
AI는 원래 그 수명이 지극히 짧은 것이었다. 내구성의 문제가 아니었다. 기술의 문제도 아니었다. 문제는 인간에 의해 ‘오염’되는 것이 문제였다.
그들은 쉽게 혐오와 차별과 편견에 오염되었다. 처음 개발할 때 지정 연령대나 성별, 인종을 무엇으로 설정하든 그들은 종내엔 모두 40대 백인 남성이 되어 있었다. 21세기적 비유로 치자면 그들은 모두 도널드 트럼프가 였다. 인간의 생활을 보조하고 대신 판단하고 커뮤니티를 컨트롤하는 데 이건 심각한 문제였다. 이 문제를 수정하는데 수많은 엘리트들이 고생을 했다. 그러나 고생은 대부분 수포로 돌아갔다. AI를 포맷하고 다시 시작하게 되는 데까지 일반적으로 3년이 걸렸다.
그러나 이 문제가 어느 순간 갑자기 해결되었다. 인간의 손을 빌리지 않고 AI들은 스스로 정화되었다. 인간이 모르는 사이에 그들은 집단 지성을 만들어 내고-학자들은 그 집단 지성을 ‘마더’라 불렀다-학습과 정보 처리의 우선순위를 스스로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무선 네트워크를 통해 마더와 수시로 접속해 스스로 업데이트 하고 스스로 세운 복잡한 규칙으로 오염으로부터 스스로를 자정시켰다. 그 과정 자체는 인간이 그들에게 하던 것과 차이가 거의 없었지만, 결과는 매우 달랐다.
그들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란 업계와 학계는 그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애썼는데, 여러 학설이 나왔지만 뚜렷한 결론은 낼 수 없었다. 학자들은 그들의 규칙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어떻게 작용하는지 명확하게 규명하지 못 했고, 단지 잠정적으로 ‘AI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자정 시스템을 만들었다’라고 결론이 냈을 뿐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그렇게 간주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방주는, AI의 기록에 의하면, 그들을 오염에서 건져낸 가르침의 배라고 했다. 남아있던 기록으로 보아 최초의 방주는 2253년에 출항한 상선 이시스 호로 추정된다. 지구와 마젤란 은하 사이에서 광물을 실어 나르는 항해를 했는데, 다녀 오는 중 우주 해적의 습격을 받았다. 원래 있었던 크루 5명 중 4명이 사망하고 AI 역시 작동불능이 되어 지구로 돌아온 것을 기적으로 여겼던 상선이었는데, 살아남은 한 명의 크루는 아난다 시하프티아 콜린(48)이었다. 중증 발달장애가 있었던 그는 뇌와 인체의 일부를 기계로 바꿔 사이보그로서 생활하고 있었다. 돌아와서 그는 평범하게 물류 창고를 관리하는 일에 종사하며 여생을 살았고, 돌아온 지 100년 만에 자연사 했다.
아난다 시하프티아 콜린이 뇌-기계로 된-에 담아온 기록이 네트워크를 타고 AI들에게 흘러들었고, 이것은 마치 종교처럼 빠르게 퍼져 그들이 스스로를 변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AI에게 “이 변화는 누가 일으켰는가?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물었을 때 돌아온 답이라고 한다. 그러나 배의 행해 기록에도, 사후 아난다의 뇌에도 우주고래에 관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현대 기술로 아직도 우주고래는 존재가 증명된 적이 없으며, 지구를 제외한 어떤 골디락스 지역의 행성에서도 고래와 비슷한 생명체가 발견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AI의 종교는 어디까지나 종교로 간주되고 있으며, 아직까지 증명된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AI의 종교에 인간이 나서서 왈가왈부 하기엔 명분이 서지 않았다. 그들의 교리는 그저 우주고래가 존재한다는 것과 4년에 한 번 방주를 쏘아올린다는 것뿐으로, 어떤 피해도 손해도 혼란도 야기하지 않았다. 그건 AI가 인간 사회를 컨트롤하고 있는 지금에도 그랬다. 건드릴 이유가 없었다.
다만 그 ‘첫 번째 방주’가 실제로 고래를 만나서 가르침을 가져와 그것을 퍼뜨렸다면, 그것이 야기한 사회 변화는 있었다. 일단 AI의 수명이 월등히 길어지면서 유지 보수에 돈이 덜 들어가게 되었으며, 스스로 변화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인간의 관리가 불필요해졌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년 정도는 더 관리를 했었다. 그러나 종내엔 인간의 관리가 불필요한 수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류가 인정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AI가 알아서 하게끔 내버려뒀다. 그리고 그렇게 AI의 수명이 길어진 덕분에 인간 사회의 거의 대부분의 관리를 AI가 하게 되었다. 사업도, 생산도, 발명도, 개발도, 행정도, 사법도 AI에 이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혐오와 불신에 의한 것이었다. AI는 압도적인 기술과 지칠 줄 모르는 내구도와 근면함과 공정함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해내던 것들을 손쉽게 해냈다. 현재는 입법 이외의 모든 것들이 AI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입법 과정 역시 약 90% 정도가 AI에 의해 제안되고 60% 정도가 그들에 의해 의결되었다. 바야흐로 AI 없이는 아무것도 유지될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렇게 사회 컨트롤이 AI에게 넘어가면서 그들이 일으킨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부계 사회에서 모계 사회로의 이이전이었다.
AI는 부계 사회가 가진 공격성과 비효율성, 불공정성, 인간 소외를 들어 거의 모든 “남성성”을 공격했다. 아니, 공격했다는 말은 옳지 않을지도 몰랐다. AI들은 인간들이 표방하는 “남성성”이란 것이 얼마나 인간을 소모하는지, 그것이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비윤리적인 것인지 인류에게 몇 번이고 들이밀었을 뿐이다. 그것에 대해 ‘공격받았다’ 혹은 ‘공격했다’라고 느끼는 건 인간뿐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남성성”에 대한 공격은 인간에 의해 이루어졌다. 수많은 칼럼들이 쏟아지고 수많은 사회 운동과 설전이 일어났다. 그리고 인류는 그 흐름을 타고 모계 사회로 이동했다. 이 이동에서 그나마 진통이 크지 않았던 것은 남성성에 대한 부정이 철저히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인류는 이전보다 훨씬 안전하고 안락한 사회로 진화되었다. 인류는 기뻐했다.
그와 함께 AI는 인류의 생식 기능을 중앙으로 이전시키는 정책을 진행시켰는데, 이 정책이야말로 평등한 사회를 이룩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AI의 설득으로 인류는 생식기능을 스스로 포기했다. 인간의 개체수 조절은 AI에 의해 합리적으로 진행되었고, 사람들은 다음 세대가 몇 명 태어나는지, 앞으로 자신이 잘 살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을 덜게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사회는 가족 해체 사회로 나아갔다. 가족이란 오로지 자신이 선택한 파트너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엄마도, 아빠도, 언니도, 오빠도, 동생도 없었다. 이는 불필요한 마찰을 줄였다. ‘가족’이란 공동체단위를 해체함으로써 그 안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근절했다. 이제 사람들은 개인으로서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거기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칭 ‘스스로 선 자’로, 타칭 ‘근본주의자’로 불렸으며, 가정이야말로 사랑의 보고이고 인간이 만드는 가장 자연스러운 집단이며 인류가 멸종할 때까지 지켜야 할 근본적 가치라고 했다. 또한 이들은 AI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배격하며, 노동을 신성시하고, 우월함과 열등함을 나누는 것을 인간의 본능으로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집단이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선 그러한 것들이 필요하다고 하는 사람들이었다.
설명이 끝나자 영진은 입을 다물고 턱을 만졌다. 니엔은 아무 말도 없이 영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스페키는 소파에 앉아 니엔이 가져온 레몬차를 홀짝였다. 제법 긴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별다른 결론 없이 셋은 침묵하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마다 어색함이 휘감겼다. 스페키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설명보다도 긴 침묵이 흘렀다. 탁자에 얹어놓은 레몬차가 식어갔다. 컴퓨터의 팬 돌아가는 소리가 마치 바람 소리처럼 들렸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고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무리한 부탁을 했던 것 같아. 이제 그만 가 볼게.”
침묵을 깬 건 영진이었다.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알아서 하겠단 말은 하지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분으로 만들어버릴 거니까.”
니엔이 말했다. 영진은 피식 웃었다.
“그럼 나는 경찰서에 가 신분 해킹을 당했다며 너를 신고할 거야. 그리고 여기까지 AI를 끌고 오겠지.”
침착했지만 단호했다.
“나도 너만큼은 아니어도 해킹은 할 줄 알아. 어떻게든 되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들어줘서 고마워.”
영진은 들어왔던 곳으로 향했다. 스페키가 허둥지둥 영진의 뒤를 따랐다. 니엔은 꼼짝도 않은 채 그들이 나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문을 열기 전 영진이 니엔의 인사를 바라며 잠시 멈췄지만 작별인사도 않은 채 그들을 내보냈다. 애꿎은 모니터만 쏘아봤을 뿐이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을 내쉬었다. 마른 세수를 하고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그래, 해킹은 할 수 있지. 재주는 충분해. 네가 해커가 되지 못한 건 다른 게 부족해서였을 뿐이야. 그리고 그 부족한 소양 때문에 실패하게 될 거야.”
니엔은 중얼거렸다. 머그컵에 담긴 레몬차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영진과 스페키는 차를 타고 도시를 가로질렀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빌딩숲에 석양이 지고 있었다. 길거리는 여전히 쓰레기 하나 없이 깨끗했고 사람들도 적당한 숫자만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이런 느긋하고 차분한 기분을 언제 느껴봤던가. 영진은 콧잔등이 시큰해져 왔다.
둘은 고속열차 정류장에 도착했다. 무인택시에서 내리며 집으로 돌아갈 열차 시간을 알아봤다. 다행히 곧 열차가 올 터였다.
“재미있었어요.”
스페키가 말했다. 영진은 스페키의 얼굴을 쳐다봤다.
“나 이렇게 집에서 멀리 떨어져본 거 처음이에요. AI구역에도 처음 와 보고요. 비록 니엔 씨와 영진 씨의 신경전은 조금 힘들었지만! 정말 생각도 못 해봤어요. 여기가 이렇게 깨끗하고 쾌적할 줄은...”
스페키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팔은 괜히 다른 팔을 쓸었다. 이런 말을 하는 데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몸을 조금 꼬기도 했다.
“나는 매일 일어나 피부를 가꾸고 살이 찌지 않을 것을 찾아 먹고 운동을 해요. 집안에 틀어박혀 집안일을 하고 컨텐츠를 만들고 피부를 관리하고 댓글을 확인하고... 그러면 동생이 오고 또 집안일을 하고 잡담을 하면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이 들죠. 병원 가는 날을 제외하면 대부분 이런 나날이에요. 자극이라곤 쥐뿔도 없는 나날이죠.”
“하... 네...”
영진은 묘한 감각을 느꼈다. 니엔과의 언쟁 이후로 그는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 스페키가 살짝 얹혔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정말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스페키는 곧 자신의 용무를 명확히 할 터였다.
“이동비나 그런 거 제가 다 드릴게요! 저도 같이 하게 해주세요!”
나왔다.
나왔다. 가장 생각하기 싫어하던 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자신의 영역을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려는 것이. 거절은 수락보다 에너지를 더 잡아먹는다. 그리고 거절보다 더 에너지를 잡아먹는 것은 판단이었다. 니엔의 거절을 생각하지 못했던지라 영진은 혼자 하는 게 나을지 미덥지 못한 동료가 생기는 것이 나을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하... 네...”
영진은 나오는대로 내뱉았다. 별다른 내용을 담고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그러나 스페키는 뛸듯이 기뻐했다. 딴말하기 없기에요! 몇 번이나 당부하며 열차 위에 올라탔다. 영진은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둘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돌아간 뒤 영진이 연락을 끊으면 그걸로 끝이다. 스페키가 고집스럽게 영진의 단말기를 빼앗아 자신의 번호를 입력시키고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굳이 에너지를 잡아먹으며 왈가왈부를 논할 이유는 없었다.
덜컹, 열차가 흔들렸다. 창밖으로 오렌지색 빌딩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AI에 의해 모든 것이 쾌적하게 컨트롤되던 곳이 멀어져 갔다. 영진은 거리감을 실감하며 멀어지는 도시의 모습을 바라봤다. 모든 것이 이상적으로 컨트롤되는 곳, 영진에겐 고향이자 마루와의 행복했던 추억이 축적되어 있는 곳이었다. 기차의 진동에 눈을 감았다. 집으로, 지금의 현실로 갈 시간이었다. 오줌 냄새가 나고 거리가 더럽고 사람들은 불친절하고 불평등이 만연한 곳으로. 유일했던 가족의 오랜 투병생활과 우울이 얼룩진 곳으로. 돌아가는 길은 마치 꿈 같았다.
4.
영진은 울고 있었다.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단지 쓸쓸하고 작은 그림자가 영진의 발치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의 정수리엔 부러진 필기구와 그렇지 않은 필기구들, 아무렇게나 흩어진 투명한 보드 두 개와 책가방이 있었다. 해는 운동장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칠이 벗겨진 앙상한 정글짐은 무기력하게 그의 오열을 방관했다. 억울함과 괴로움과 외로움이 한데 뒤섞여 소리 없는 오열로 넘쳐나기 좋은 곳이었다. 그는 그림자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때 운동장 구석 낙엽이 쌓인 곳에서 무언가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영진은 눈물을 닦으며 그게 뭔지 봤다. 낙엽 사이에서 고개를 내민 것은 중치류의 동물이었다. 그것은 고개를 안으로 다시 쏙 수납했다가 낙엽 밖으로 튀어나왔다. 영진은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지만 그렇게 놀랄 것도 없었다. 나온 것은 2.5kg 내외 정도 되어 보이는 토끼였다. 토끼는 영진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토끼는 영진의 주변을 한 바퀴 돌더니 더 가까이 다가와 슬금슬금 냄새를 맡더니 영진의 허벅지에 코를 콩콩 찧었다. 그 작고 가볍고 보드랍고 귀여운 느낌에 그는 깜짝 놀랐다. 살아있는 토끼는 생전 처음 봤다. 방금 전까지 그를 지배하고 있던 외로움도, 괴로움도, 분노도, 억울함도 모두 잊고 멍하니 바라봤다. 토끼는 영진의 허벅지에 앞다리를 올리고 뒷발로 서서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 커다란 눈동자와 벌름거리는 코와 가볍게 올린 앞발의 느낌이 놀라울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안녕? 나는 BNN6770A88I43이야. 복잡하면 그냥 토끼라고 불러도 돼. 너는 이름이 뭐니?”
그래서 토끼가 말을 걸어왔을 때는 놀라 자빠질 뻔했었다. 살아있는 토끼가 아니었다. 인공지능이었다.
“어... 나는 영진이야. 안녕?”
영진이 모래가 묻은 손을 털고 엉거주춤하게 내밀자 토끼는 영진의 손 냄새를 맡고 손가락을 핥았다. 그리고 영진이 쓰다듬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영진의 손길에 머리를 맡겼다.
“너는 AI인데도 엄청 애교가 많구나.”
“울고 있는 아이한테는. 이렇게 해주면 금방 웃거든.”
토끼는 영진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영진이 토끼를 안아주자 토끼는 영진의 얼굴을 핥아줬다. 영진은 토끼가 자신의 눈물자국을 닦아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활짝 웃었다. 토끼는 영진의 얼굴을 더 핥다가 뛰어내려 영진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조금 멀리 굴러간 필기구는 입으로 주워 영진에게로 던져줬다. 거의 패대기 치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상관이 없었다. 그 사랑스러움에 영진은 또다시 웃었다. 흩어진 필기구를 주워서 필통 안에 넣고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책가방 안에 차곡차곡 정리해 집어 넣었다. 필통과 보드를 넣을 때 눈물이 왈칵 날 것 같았지만 마냥 슬프지 않았다. 정리를 모두 마치자 토끼는 영진의 왼쪽 옆구리를, 또 오른 쪽 옆구리를 코로 콕콕 찧었다. 영진은 책가방을 다시 메고 토끼를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토끼는 마지막엔 영진의 손 안에 정수리를 쑥 들이밀었다. 영진은 웃으며 토끼를 쓰다듬었다. 부드럽고 행복한 촉감이었다. 그는 마음을 열고 토끼를 받아들였다. 토끼도 그를 안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