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니까 접어 놓겠습니다.
검은 개가 거기 있었다. 자정에 가까운 늦은 밤, 편의점을 제외하곤 문을 연 곳도 없는 어두운 길에서 두 눈을 푸르게 빛내며 길 건너편에서 영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영민은 개가 반가웠다. 그 길고 검은 털을 만져본 적은 없었지만 예전부터 몇 번이고 만났던 익숙한 개였다. 맥주도 사고 동생도 데려올 참으로 대문을 나선 영민은 길을 건너 개에게 다가갔다. 개는 영민이 길을 건너오자 몸을 돌려 대로변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영민은 홀린 듯 개를 따라 갔다.
기묘한 밤이었다. 건물은 영민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고, 오렌지색 가로등 불빛엔 미세먼지가 잔뜩 낀 11월의 차가운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길에는 차는커녕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침묵만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영민은 걸을 때마다 침묵이 다리 사이에 휘감기는 것을 느꼈다.
그 모든 기묘한 것들에도 영민은 불안감을 느끼지 않았다. 개는 모퉁이를 돌았고 영민도 함께 모퉁이를 돌았다. 4차선 도로가 나왔고, 검은 개는 한블럭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혹시 털을 만져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개를 따라 갔고, 개는 대로변에서 안쪽으로 꺾이는 골목, 가로등의 공백에서 어둠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영민은 골목 안을 살펴봤지만 개는 사라지고 없었다.
“형!”
골목 밖에서 동생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반가워하는 목소리였다. 영민은 뒤를 돌아 길 건너편의 동생을 봤다. 동생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차피 도로에 자신 이외에 아무도 없음에도 자신이 거기 있음을 알리고 싶어 하는 동작이었다. 그리고 영민의 동생은 도로를 향해 거침없이 발을 내딛었다. 횡단보도가 아님에도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정민아!!”
영민이 그의 이름을 외쳤다. 마치 거짓말처럼 차 한 대가 나타나 그의 동생을 쳤다. 영민은 자리에 멈춰 서서 동생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목격했다. 동생의 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 것 같았다. 차는 긴 타이어 자국을 남기며 도로 위에 섰다. 운전자가 다가와 동생의 상태를 살필 때까지 영민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동생에게 다가가서도 멀거니 동생을 내려다 보기만 했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구급차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영민은 소리에 반응하듯 구급차를 쳐다보았다. 오렌지색 옷을 입은 대원들이 동생을 들것에 옮겨 구급차에 태우고 있었다. 영민은 마치 멀리서 바라보듯 그것을 바라보았다. 소리가 왕왕 울리는 것 같았다.
문득 영민은 이유를 알 수 없이 동생이 길을 건너기 전에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큰 개가 있었다. 검은 개, 영민을 이곳으로 이끈 그 크고 검은 개가 파란 눈을 빛내고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개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영민의 시선을 알아챈 후 한동안 눈을 마주쳤다. 영민은 그 검은 개에게 유일하게 현실감을 느꼈다. 그 현실감은 희미한 책망이었다. 그러나 개는 마치 조소하듯 그를 홀로 두고 뒤로 돌아 다시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사고 장소에는 다시 영민만이 현실감을 잃은 채 남았다. 환상 같은 구급대원이 그를 일으켜 세워 구급차로 밀어넣을 뿐이었다.
신의 길
11월의 쌀쌀한 바람이 코트 속으로 스며들었다. 영민은 옷깃을 여몄다. 작은 광장을 안은 고속버스 터미널의 불빛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터미널 안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바깥보다 안은 새것의 매끈함과 차가움이 있었지만 온기가 부족했다. 이 터미널은 발권기와 창구, 탑승공간은 2층에 두고 1층에는 대형 매장을 입점시켰다. 그래서 밤 11시가 넘어가는 이 시간엔 거의 불이 꺼지고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일부 공간에만 불이 켜져 있어 조금 으스스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목덜미로 한기가 파고들었다. 영민은 어깨를 좁히고 부르르 떨었다. 시커먼 에스컬레이터가 입을 벌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층 위로 올라가자 2층의 밝은 조명과 무인발권기가 그를 맞았다. 그는 야근으로 지친 어깨를 들어 겨우 발권기의 버튼을 눌렀다.
결제를 위해 영민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는 동안 옆자리에 한 청년이 와 섰다. 청년은 빠른 속도로 버튼을 눌러 순식간에 표를 구입했다. 발권기는 표를 끊임없이 토해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손이 빠른 청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던 영민은 놀라서 그의 얼굴을 힐끔 훔쳐보았다. 그는 숱이 많고 약간 긴 곱슬머리에 갸름한 얼굴, 짙고 모양새 좋은 눈썹에 짙은 쌍꺼풀이 진 커다란 눈에 오뚝한 코, 조금 도톰한 입술을 하고 있었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과 갈색의 눈동자까지, 얼굴엔 동남아인의 특징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영민은 이유도 없이 당황해서 자신의 발권기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마 일행들이 밖에 있나보지. 이 날씨에? 아니, 먼저 와서 표를 사고 있나보지. 불시에 자신 안의 인종차별과 조우한 그는 조금 부끄러워하며 다시 발권기를 조작했다. 그가 옆자리 청년에게 놀라는 사이 발권기가 초기 화면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이젠 좀 편안한 마음으로 자리 선택으로 들어가 보자 아까는 거의 비어 있던 좌석의 자리가 전부 나간 것이 보였다. 조금 전에 자신이 선택했던 자리만이 남아 있었다. 결제 과정만 남아서 그가 선택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마침 빈자리가 일행의 숫자와 딱 맞아 떨어졌다니, 기막힌 행운이었다. 영민은 자신의 표를 받으며 그 운으로 로또를 하면 대박 터졌을 텐데 하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단 한 번도 되돌아가는 과정 없이 정확히 버스의 남은 좌석 수를 선택하여 자리를 선택하고 표를 받아갈 수 있다니, 천운이 따르는 사람인 듯했다.
영민은 표를 잡고 몸을 돌렸다. 문득 손 언저리에서 털이 살랑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자 검은 개가 옆에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영민은 흠칫했다. 개는 영민을 스쳐 지나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걸어갔다. 개는 아까의 청년 옆을 스쳐 지나 좌석 끄트머리에 교복을 입고 앉은 남고생 앞에 서성거렸다. 영민은 홀린 듯 개를 향해 걸어갔다. 개는 남고생의 커다랗고 무거워 보이는 은색 트렁크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더니 남고생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남고생은 개가 보이지 않는 듯 미동도 없이 정면을 보고 앉아 있었다. 개는 몇 번이나 겅중거리며 학생의 무릎에 앞발을 올리고 냄새를 맡다가 다가오는 영민을 돌아보더니 스르르 사라졌다.
영민은 학생의 자리에서 두 자리 건너 자리에 앉았다. 학생은 하얗고 예쁘장한 얼굴에 긴 팔다리를 하고 있었다. 영민은 그에게서 동생의 그림자를 찾았다. 그의 동생도 그렇게 하얀 얼굴에 긴 팔다리를 하고 아직 성장기인 소년 특유의 조금 불안정하고 신경질적인 선을 하고 있었다. 방학이 되어 고향에 갈 때마다 웃으며 반겨주던 예쁜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는 얼굴을 감쌌다. 자괴감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소년과 외국인 사이에서 괴로워했다.
11시 50분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매진된 버스 치고는 사람이 적었다. 버스표를 잔뜩 사던 외국인은 줄의 맨앞에 서서 차표를 보이고 있었다. 영민은 줄을 서서 주변을 살폈다. 주변에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소년이 버스의 옆구리에 트렁크를 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꽤나 묵직한지 혼자서는 애를 먹고 있었다. 영민은 그의 곁으로 가 트렁크의 한쪽을 들었다. 소년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는 트렁크를 안으로 밀어넣었다.
“감사합니다.”
“아니...”
꾸벅 고개를 숙이는 소년에게 그는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당연한 거야.”
그는 그렇게 대답하곤 버스에 올라 탔다.
버스 안에는 약 열 명가량 되는 사람들이 타 있었다. 뒤쪽 자리엔 예의 외국인이 자리를 뒤로 최대한 밀고 누워 있었다. 영민은 구입한 일인석에 앉아 좌석을 조절했다.
의자를 통해 온몸으로 버스 엔진의 진동이 느껴졌다. 이렇게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10시가 넘도록 야근을 했단 사실이 떠올랐다. 내일이 동생의 기일이었고 모레는 주말이었다. 금요일의 일까지 다 해치우려다 보니 생각보다도 힘든 하루가 되었다. 몸에서 힘을 빼자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 왔다. 정신은 군데군데 점점이 끊겼다가 까무룩 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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