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미포 2601자, 단어수 812
2000자는 역시 짧네요ㅠㅠ
코끝이 시렸다. 온몸이 차갑고 뻣뻣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힘들었다. 영민은 눈을 떴다. 후두부가 찡하니 울렸다. 그러고 보니 누군가 자신의 뒤통수를 세게 때렸었다. 그랬었지. 하지만 그는 버스 좌석이나 바닥에 누워있는 게 아니었다. 차갑고 평평한 바닥과 석면으로 된 천장, 그리고 불이 꺼진 형광등이 보였다. 창으로 달빛도 쏟아지고 있었다. 영민은 누워서 멍하니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가늠했다.
“일어났어요?”
누군가 말을 걸었다. 분명 셀카봉을 빌려준 사람의 목소리였다. 영민은 자신이 멀쩡함을 증명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아야!”
일어나려니 뒤통수가 또다시 욱신거렸다. 아파서 손으로 머리를 감쌌지만 사람들은 멀리 모여 앉아서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일어났어?”
중년의 남자가 말을 걸었다. 말투는 퍽 다정했지만 역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예. 그런데 여긴 웬 학교죠?”
영민이 말했다. 그의 말 그대로 그곳은 학교였다. 더 정확히는 교실이었다.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칠판, 그 위에 걸린 국기와 급훈, 그 앞에 서 있는 교탁, 교탁 앞에 몰아놓은 책상과 의자들, 그들이 앉아 있는 공간 뒤편에는 학급 소식이 걸려 있고, 그 아래엔 사물함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그때 쓰러져 있어서 모르시겠네요. 그때보다 좀 오다보니 다시 정상적인 길이 나오더라고요. 근데 여기가 표지판도 하나도 없고 온통 가정집들뿐이어서, 학교가 보이길래 혹시나 싶어 들어와 봤어요.”
덩치가 좋은 20대 남자가 말했다. 차 안에서 영민이 기사를 구하러 가려던 것을 막던 그 청년이었다. 영민은 사람들이 앉은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은 뒷문 앞에 모여 앉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런데 저는 왜 여기에...?”
영민이 묻자 중년의 남자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우리가 이 학교에 뭐가 있는지 알아보는 사이에 버스가 도망을 쳤거든. 그... 자네랑 짐을 전부 운동장에 내던지고 말이야. 나쁜 놈들이!”
“지금 여기 남은 사람들 빼고 나머지 사람들이 말인가요?”
“그래.”
영민은 남은 사람들의 얼굴을 봤다. 영민의 질문에 답해주던 사업가 인상의 중년 남자와 20대 청년, 셀카봉을 빌러주었던 20대 여성과, 단 한 마디도 않고 조용히 앉아 상태를 바라보던 마른 체형의 30대 여성, 그리고 버스에서 통로 건너 옆자리에 앉았던 남학생이 거기 앉아 있었다. 그는 표를 한꺼번에 잔뜩 사던 남자가 없어진 것에 약간 실망감을 느끼면서도 그 남학생이 함께 있단 사실에 안도했다.
“어떻게 하기로 했나요?”
영민이 묻자 다들 입을 다물었다. 아직은 별달리 계획이 세워지지 않은 상태인 것 같았다.
“낮이 되면 사람들이 돌아다니겠지. 여기가 허허벌판도 아니고. 그때까지만 여기서 버텨보자고.”
사업가가 말했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내셨어요?”
영민이 물었다. 그러자 셀카봉을 빌려줬던 20대 여성이 조금 날카로운 어조로 대답했다.
“핸드폰 보세요. 지금 와이파이고 데이터고, 심지어 신호조차 잡히지 않아요. 여기가 어딘지 무슨 수로 알아요?”
영민은 그녀의 말에 코트 주머니니를 뒤적거렸다. 그녀는 중년 남성을 향해 말을 이었다.
“아저씨 진짜 낙관적이시네요! 오는 길에 사람은커녕 개 한 마리 못 봤는데! 아무리 밤이고 시골이라도 사람 있는 곳에 개 짖는 소리, 고양이 울음소리 하나 안 나고, 주차된 차 한 대도 없고, 핸드폰 신호도 안 터지는 데가 어디 있어요? 여기 사람이 있을 거라고 무조건 단정하는 이유가 뭐예요?”
“저기요! 말버릇이 그게 뭡니까?!”
20대 청년이 그녀에게 공격적으로 쏘아붙였다.
“주택이 있으니까 사람이 있지! 아가씨가 잘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사람도 없는 주택을 요즘 같은 세상에 가만 내버려둘 것 같아요? 다 허물든가 해서 뭐라도 만들지! 여기만큼 주택이 있으면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 거예요!”
“모르긴 뭘 몰라요? 요즘 같은 세상에 여기만큼 주택이 있는데 기지국 하나 설치 안 하고 핸드폰 신호도 안 터져요? 산골 오지도 아닌데?”
중년 남성의 반박에 그녀가 다시 반박했다. 중년 남성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자자, 어쨌거나 해가 뜰 때까지는 같이 있어야 할 것 같으니 그러지 말아요. 다들 통성명은 하셨어요? 저는 이름을 하나도 모르니까 서로 소개부터 해요. 저는 박영민이라고 하고, 회사원입니다. 서른 세 살입니다.”
영민의 중재에 험악해졌던 분위기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사람들은 조용히 서로를 쳐다보았다. 두 번째로 입을 연 것은 30대의 여성이었다.
“정혜윤이에요.”
그녀는 그것으로 소개를 마쳤다. 사람들은 그녀가 뭔가 더 말을 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걸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뒤를 이어받은 건 중년의 남성이었다.
“최진호입니다. 52살이고, 조그만 개인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사업상의 일로 지방으로 가는 길에 이렇게 사고를 만날 줄은 몰랐네요. 그... 사업은 여러분, 언제 어디서 고객으로 만날지 모르니까, 소개가 끝나고 제 명함을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인 게, 사고를 당했어도 이렇게 어여쁜 아가씨들과 함께여서...”
“저는 이미정입니다! 회사원이고, 고향에 가던 길이었습니다.”
끝도 없이 이어지려던 중년 남성-진호의 자기소개를 20대 여성-지혜가 끊고 자기 소개를 했다. 20대의 덩치가 좋은 남자는 그녀의 태도가 불만스러운지 그녀를 잠시 노려본 뒤 자기 소개를 시작했다..
“오인해입니다. 23살이고, 헬스트레이너입니다. 잠시 볼일이 있어 고향에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눈은 마지막 남은 학생에게 집중되었다. 그는 시선을 부담스러워하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팔을 연신 쓸어내렸다.
“한준회예요. ...학생입니다.”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진호가 그를 반기는 기색으로 질문했다.
“오, 학생! 몇 살이야?”
“열... 열 여덟 살이에요.”
“열 여덟? 그런데 왜 혼자 심야버스에 탔어? 고2면 아직 원서 낼 때도 아니잖아! 집이 어느 쪽이야? 왜 버스에 교복 입고 탔어?”
진호의 질문은 거침이 없었다. 준회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다들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던 건지 아무도 그의 질문을 막아주지 않았다. 준회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 제사를... 제사를 지내야 해서... 엄마...아빠가 이혼 하셨거든요.”
아아, 하고 사람들은 그제야 납득한 듯했다. 동시에 분위기가 조금 무거워졌다. 괜한 것을 물은 탓이었다. 준회는 다시 입을 다물었고 몇 사람은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자기소개를 마친 그들은 먼저 1층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들이 있던 1-3 교실에서 빠져나와 1-1 교실로 갔다. 그러나 1-1 교실은 문이 잠겨 있었다. 1-2도 마찬가지였다. 1-3 교실 옆은 중앙현관이었다. 탁 트인 공간에 벽면을 따라 액자가 몇 개 걸려 있었고, 그 아래로 트로피를 담은 장식장이 길게 놓여 있었다. 액자엔 학교의 교화로 보이는 보라색 꽃들이 찍힌 사진이 걸려 있었다. 영민은 핸드폰을 꺼내 들어 액자 밑의 명패를 비쳐봤다.
교화: 락스퍼(Larkspur)
꽃말: 정의,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