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글이 너무 심하여... 일단 퇴고를 해봤습니다.
읽기에 어떨지 모르겠네요.
그는 겁을 먹었다. “어머니”가 이번에도 사람을 죽이지 못하면 대신 그를 죽여버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실제로 어머니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힘도 들이지 않고 순식간에 해치웠다. 그는 억울한 죽음을 앞에 두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와 “어머니”에겐 특별한 힘이 있었다. 먼저 그의 어머니를 말하자면 그녀에겐 금기(禁忌)의 능력이 있었다. 범위를 정해서 무엇이든 상대방의 행위를 금할 수 있었다. 예컨대 그에게 내려진 어머니의 금기는 이런 것이었다. ‘어머니에게서 3km 이상 벗어나지 말 것’, ‘학교 이외의 곳엔 어머니의 허락이나 동행 없이 가지 말 것’, ‘학교 이외의 곳에서 2시간 이상 어머니와 떨어져 있지 말 것’, ‘어머니의 연락을 무시하지 말 것’, ‘어머니의 말을 거역하지 말 것’,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말 것’, ‘어머니와 관계된 이야기를 하지 말 것’, ‘집안 이야기를 하지 말 것’, ‘다른 사람을 때리지 말 것’과 같은 속박이었다. 다만 사람을 죽일 때는 조금 다른 것을 금지했다. 먹지 말 것, 마시지 말 것, 잠을 자지 말 것, 숨을 쉬지 말 것과 같은 것을 주문하는 모양이었다. 그것들은 어머니가 상대방에게 직접 말을 함으로써 적용되는 속박이었다.
그리고 그의 힘은 두 가지였다. 다른 세계로 이어지는 문을 여는 힘과 ‘건축’의 힘이었다. 후자는 자신의 이미지를 구현하여 쌓아 올리는 것이었다. 다만 그 과정에 시간이나 자재는 필요 없었다. 필요한 것은 구체적인 상상과 그의 특별한 능력뿐이었다. 그러고자 하면 언제 어디서든 상상한 것이 만들어졌다. 그는 그 능력에 만족했다. 실력도 탁월했다. 그는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해체하는 것을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곧잘 하던 놀이였다. 그 능력으로 인해 그의 인생이 고달파지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능력이 없어지길 바란 적은 없었다. 조금 더 도움이 될 만한 능력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생각해본 적은 있었어도.
문을 여는 것’은 조금 성질이 다른 것이었다. 먼저 그가 허공에 문의 형상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미지 상의 문을 열면 ‘다른 세계’로 이어졌다. ‘다른 세계’는 단 한 톨의 빛도 없는 곳이었다. 앞뒤도 분간할 수 없고, 딱히 장애물이나 돌부리 같은 것도 없었다. 그 때문에 아무렇게나 걸어도 어디 부딪칠 일은 없었지만, 너무 어두워 균형을 잃고 넘어질 때도 있었다. 넘어질 때 추락의 이미지를 떠올리면 실제로 추락을 하기도 했다. 앞뒤좌우아래위의 개념도 없었고 ‘바닥’ 역시 절대적이고 물리적인 ‘바닥’이 아니었다.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바닥이었고, 바닥을 인식하지 못하면 그대로 추락해 미아가 되기 십상이었다.
그는 이 ‘다른 세계’를 상당히 어릴 때 발견했었다. 문을 여는 것은 할 수 있었지만 즐겨 하지 않았다. 문 너머의 세계가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거기엔 ‘눈 먼 거인’이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 우연히 눈 먼 거인이 비명을 질러대던 누군가의 머리통을 부수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손전등으로 그들을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분명히 거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들켰을 거라 생각했었다. 거인이 피투성이가 된 둔기를 들고 다가오는 동안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꼼짝없이 거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심장이 오그라들 것만 같았다. 분명히 거인이 자신의 작은 머리통도 부숴버릴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거인은 살인 현장을 비추고 있던 그를 스쳐 지나갔다. 다만 멀리서 다른 누군가가 비명을 지르자 그곳으로 쿵쿵 뛰어갈 뿐이었다. 그는 그 뒤로 한동안 그곳을 찾지 않았다. 지금의 “어머니”와 함께 살기 전까지 말이다.
“어머니”를 만난 이후로 그는 다시 ‘다른 세계’를 열게 되었다. 희한하게도 그곳으로 들어가면 어머니의 장소에 대한 속박은 사라졌다. 시간에 대한 속박은 느슨해졌다. 거기선 시간 역시 느리게 흘렀다. 마치 장소 자체가 그러하듯 시간의 밀도 역시 희박했다. 눈 먼 거인이 있다고는 하지만 “어머니”에 비하자면 공포조차 되지 않았다. 그곳은 그의 유일한 도피처가 되었다.
그는 문을 열고 다른 세계에서 “어머니”가 지정한 목표자가 있는 곳으로 나왔다. 불 꺼진 거실이었다. 대리석 바닥에 크고 두꺼운 암막커튼, 천장에 묶인 거대한 샹들리에, 그 아래 묵직한 탁자와 주변을 둘러싼 고급스러운 소파, 그리고 탁자 중앙에 놓인 생생하게 핀 꽃이 거실을 차갑고 위압적으로 꾸미고 있었다. 그는 목표자를 찾았다. 가장 중앙의 가장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중년 남자였고 광택이 있는 실크 나이트 가운을 입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그가 얼마나 권위 있는 사람인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거느리고 있으며 중요한 사람인지 나타내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 앉은 주인은 그다지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탐욕스럽고 지위와 탐욕에 비해 머리가 나쁘고 판단력이 둔한 중장년의 평범한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목표자에게 약간의 연민을 느꼈다. 그러나 해야만 했다. 어머니가 근처에서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는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갔다.
“누구야!!”
빛에 그의 모습이 노출되자 목표자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그는 또다시 덜컥 자리에 얼어붙었다. 괜찮아. 생각해둔 방법이 있어. 그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고 자신도 다치지 않고 넘어갈 수 있어. 두려움에 얼어붙는 스스로를 격려했다. 그는 목표자가 느린 걸음으로 벽난로를 향해 걸어가는 것을 봤다. 벽난로에는 격조있고 무거워 보이는 긴 불쏘시개가 있었다. 그 옆에는 골프채가 있었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저 스틱에 맞을 일은 없을 거야.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목표자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했다.
“보아하니 아직 어린 나이 같은데,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왔어? 응? 그 나이에 벌써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함부로 들어오고 그러면 안 되지, 안 그래? 뭐하러 왔어? 도둑질 하러 왔어?”
목표자는 골프채를 잡아 들었다. 그는 움찔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목표자는 그 모습을 보고 어깨를 풀었다. 생각보다 만만한 상대인 것 같다고 판단한 것이다. 움직임에는 자신감이 깃들었다.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도둑질은 아니에요. 사장님이 오늘 여기 있는 줄 알고 왔어요. 성매매 하실 때는 여기서 비밀리에 하신다면서요.”
아는 사람은 아는 것 같지만. 그는 뒷말을 삼켰다. 목표자가 선량한 사람이 아니란 게 그나마의 위안이었다. 그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아쉽게도 다 찍혀버렸네요. 내일 아침이면 언론에 쫙 퍼질 거예요. 놀라실까봐 미리 알려드리는 거예요.”
“어! 야!! 잠깐만!!”
자그만 달빛에도 날카로운 빛을 내는 골프채가 무색하게 목표자는 얼빠진 얼굴을 했다. 뒤통수를 사정없이 얻어맞은 표정으로 그에게로 다가갔다.
“잠깐만, 얼마를 원해?! 얼마면 되겠어?!”
목표자가 점점 거리를 좁히자 그는 “문을 열었다”.
목표자는 그를 잡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를 쫓아왔고 그는 점점 더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아예 등을 돌리고 뛰어가기 시작했다.
“야! 잠깐만!!”
중년 남자가 자신을 쫓아올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는 목표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휴대폰 불빛을 비추며 달려갔다. 그게 그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배려였다.
“야!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숨이 차는지 목표자의 숨소리며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뿐만 아니었다. 뭔가 이상을 느끼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이제야! 그는 목표자의 아둔함에 혀를 찼다.
“야, 이상하잖아!! 어디야!!... 여기 어디야!! 야, 빨리 말해!!”
목표자가 계속 그를 쫓아 달리며 소리쳤다. 그는 뚱뚱한 중년 남성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계속 달렸다.
여기는 현실과 다른 공간이었다. 인간이 따로 불빛을 만들어 비추지 않는 한 빛 한 점 없는 곳이었고, 인간의 소음이 없는 곳이었다. 우주와 같은 침묵의 공간이었고 절대적인 어둠의 공간처럼 보였다. 그야말로 그렇게 오해되기 쉬운 공간이었다. 그러나 잘 들어보면 작은 소음들이 있었다. 멀리서 눈 먼 거인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있었고, 의미 없는 벼룩들이 움찔거리는 소리도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더할나위 없는 평화로운 어둠의 공간이었다. 거의 무(無)에 가까운 공간이었다. 거기서 그는 그 이외에 유일하게 살아있는 “인간”과 술래잡기 중이었다. 심지어 그 인간은 “어머니”가 죽이라고 지시한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목표자는 그의 계획에 완벽히 걸려들었고, 목표자는 죽지 않았지만 마치 죽은 것처럼 바깥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게 될 것이었다. 그는 신이 났다.
목표자는 이미 지쳐 있었다. 다만 앞서 가는 자를 놓치면 이 이질적인 공간에 혼자 남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죽을 힘을 다해 쫓아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뜀박질에 여유가 생긴 탓에 이것저것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먼저는 그의 발걸음 따라 꽃이 피었다. 흙도 없는 곳에 꽃이 폈다. 그러다 가로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는 눈길이 닿는 곳에 불이 켜진 편의점도 만들어 올렸다. 그러고 나자 그는 도로를 만들었다. 상수리 나무를 규칙적인 배열로 만들어 올리고 나지막한 상가나 집들도 만들어 올렸다. 다만 밤이니까 불은 꺼뒀다. 그들은 어느 샌가 8차선 대로를 뛰고 있었다. ‘건축’이 여느 때보다 잘 이루어졌다. 마치 손꼽히는 명연주자들과 함께 공연하는 지휘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는 8차선 도로에서 작은 길로 들어섰다. 학교가 나타났다. 활짝 열린 밤의 교문을 지나 그들은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학교는 그의 선망이었다. 학교에서의 시간은 부드럽고 관대했다. 적절히 융화될 수 있었고 거기서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가능하면 그는 계속 학교에 있고 싶었다. 학교야말로 그의 안식처이자 도피처였다. 그에게 안전을 보장해줄 수 있었던 유일한 곳이었다. 그리웠던 운동장, 현관, 그리웠던 신발장, 교실들, 그는 마치 조깅을 하듯 자신이 만든 학교를 음미했다.
그는 뒤를 쫓는 남자가 어디까지 왔는지 확인했다. 아직도 학교 정문을 막 지나고 있었다. 그는 거리가 벌어진 김에 달도 만들어 쏘아 올렸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남자는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는 배를 잡고 웃었다.
남자가 학교 안으로 들어오자 그는 1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중앙현관으로 올라오던 남자는 그가 우측 현관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보고 괴성을 지르며 쫓아오기 시작했다. 그는 재빨리 내려와 뒷문으로 나왔다. 나오면서 문을 잠가둔 것은 덤이었다. 그는 통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울부짖는 목표자에게 말했다.
“미안해요. 하지만 지금은 안 죽었잖아요. 모든 것이 정리될 때까지 여기서 지내세요. 혹시라도 졸지 말고.”
목표자는 유리를 치며 울부짖었다. 그는 입술에 손가락을 댔다.
“너무 시끄럽게 굴지 말아요. 눈 먼 거인들이 올지도 몰라요! 그들은 소음을 싫어하니까... 기껏 죽을 위기에서 구해준 생명 아깝게 버리지 말아요.”
그는 목표자를 학교 안에 버려두고 학교 밖으로 나가 다시 “문을 열었다.”
열린 곳은 목표자의 집 근처 도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슬픈 눈으로 목표자를 흘긋 본 후 문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목표자는 계속 욕설을 하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곧 그는 조용해졌다. 학교 안으로 누군가 들어와 그의 머리를 깨부쉈기 때문이었다.
뒷문엔 핏자국이 낭자하게 남았다. 그러나 닦아줄 사람은 없었다. 학교는 그저 다음 사람이 들어오길 기다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