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저녁 석양이 담요처럼 하늘을 덮었다. 깊은 산속에 턱을 괴고 잠들어 있던 밤혹등고래는 기지개를 켜듯 몸을 쭉 펼치며 부르르 떨었다. 그 거대한 몸짓에 새들이 푸드덕거렸고밤혹등고래의 등에 올라타 있던 병아리와 토끼도 잠에서 깨어났다. 밤혹등고래는 옆 지느러미로 옆구리를 툭툭 털었다.
“잘 잤어?”
토끼가 기지개를 켜며 인사했다. 밤혹등고래는 토끼의 체온과 기척을 느꼈다. 그보다 더 조그만 병아리의 감촉도 느껴졌다. 그녀는 새삼 반가움에 입을 옆으로 벌려 웃었지만 곧 다시 왼쪽 지느러미로 옆구리를 툭툭 쳤다. 옆구리가 근질거리고 화끈거렸다. 뭔가가 그녀의 등으로 올라가기 위해 나무를 타고 옆구리에 발톱을 박아 올라온 게 분명했다. 등으로 그 정체불명의 방문자의 체온도 느낄 수 있었다.
“잘 잤니? 새로 온 친구도 안녕?”
밤혹등고래가 인사하자 낯선 동물이 그녀의 등을 타고 토끼와 병아리에게 다가가는 것이 느껴졌다. 토끼는 움찔거렸다.
“안녕하신가?”
토끼는 옆으로 누워 방문자를 쳐다보았다. 방문자의 정체는 하얀 바탕에 노란 줄무늬가 있는 오동통하고 꾀죄죄한 치즈태비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날카로운 눈매로 황금색 눈동자를 빛내며 토끼와 병아리 앞으로 와 앞발을 가슴팍에 모으고 엎드렸다.
“누구야?”
말을 할 수 없는 병아리 대신 토끼가 물었다. 고양이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나는 ‘꼬리 잘린 고양이’외다.”
토끼는 눈을 가늘게 떴다.
“거짓말! 꼬리가 멀쩡히 붙어 있잖아!”
“아니, 내 이름이 ‘꼬리 잘린 고양이’외다. 이래뵈도 생전엔 꼬리가 반토막이 나 있었거든.”
토끼는 꼬리 잘린 고양이의 길고 통통한 꼬리를 보았다. 생전에 꼬리가 없었는데 어떻게 죽어서 꼬리가 자라났을까? 무슨 이유에서일까? 토끼는 자신의 가늘고 볼품없는 뒷다리와 꼬리 잘린 고양이의 온전한 꼬리를 비교하며 보았다.
“그래, 꼬리 잘린 고양이야. 무슨 일로 우리를 찾아왔니? 너도 천국을 찾아서 왔니?”
밤혹등고래가 물었다.
“아니, 나는 지금의 자유로운 생활에 만족하고 있소이다. 그보다도 익숙한 냄새에 이끌려 왔소이다.”
고양이는 대답하며 앞발로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익숙한 냄새라니, 무슨 냄새를 말하는 것일까? 길 잃은 동물들의 냄새? 절망의 냄새? 고양이는 절망과 별 관련이 없어 보였다. 토끼와 병아리는 유심히 고양이를 쳐다보았다. 고양이는 웃었다.
“나도 실은 인간 곁에 잠깐 있었던 적이 있었다오.”
고양이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양이는 원래 길에서 태어났다. 꾀죄죄하고 먹을 것이 부족한 거리 생활에서도 고양이는 어떻게든 생존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길 위의 삶이 으례 그렇듯 고단함의 연속이었다. 고양이는 인간에게 의존함으로서 약간의 안락함을 얻고자 했다.
밥을 주던 인간은 고양이의 꼬리에 끈을 꽉 묶었다. 끈은 조직을 괴사시켰고, 고열과 고통 속에서 묶인 부분이 몸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겨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동안 고양이는 인간을 멀리했다. 또 누군가 약간 남은 꼬리를 묶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멀어진 삶은 고단함으로의 귀환을 의미했다. 고양이는 지쳤고, 자주 탈수에 시달렸다. 배고픔에 쥐를 잡으려 해도 잘린 꼬리 때문인지 그간 밥을 얻어먹던 버릇 때문인지 쉽지가 않았다. 배고픔과 탈수에 허덕이던 고양이는 길 위에 쓰러졌고, 그런 고양이를 또다시 인간이 주웠다.
고양이는 인간의 집 베란다에 살게 되었다. 여전히 꼬질꼬질했지만 밥과 물은 나왔다. 이번엔 잘 해보리라 생각했다. 그 집의 자녀들이 나오면 무릎 위에 앉아 애교를 부렸다. 아이들은 순진했고 자신을 좋아했다. 고양이는 이제 좀 팔자가 펴려나 생각했다.
그러나 그 집의 어른 중 하나가 또 자신을 길 밖으로 내쫓았다. 고양이의 생활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후로 며칠간 고단한 삶을 더 이어갔고, 도로변에서 마실 것이 없어 탈수로 죽었다. 그 시신은 또다시 인간이 주워 주택가 한구석에 마련된 조그만 화단에 묻어줬다.
고양이의 이야기를 들은 토끼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 인생과 자신들에게서 나는 익숙한 냄새 사이에 무슨 접점이 있는가? 고양이는 또다시 웃었다.
“자네들의 꼴을 보아하니 억울함이 온몸을 짓누르고 있구만. 죽고 나서까지 생전의 고통을 겪는 건 마음에 맺힌 응어리가 있기 때문이외다.”
고양이의 말에 병아리가 발을 버둥거렸다. 병아리는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움직일 수 있는 딱 붙은 다리를 버둥거리는 것으로 의사를 표현했다. 병아리는 최선을 다해 고양이의 말을 부정하고 있었다. 애처로운 움직임이었다.
“아니라고? 나를 봐! 나는 ‘꼬리 잘린 고양이’였지만 꼬리가 멀쩡해졌잖아!”
고양이는 약간 억울함을 호소하듯 말했다. 토끼는 미심쩍은 눈빛을 했다. 애당초 ‘꼬리 잘린 고양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지만 실제로 꼬리가 잘렸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까 익숙한 냄새가 난다고 했지? 무슨 뜻이야?”
토끼가 물었다. 고양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병아리와 토끼 사이로 걸어들어가 둘의 정수리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고양이는 머리를 높게 들고 숨을 들이켰다.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는 표정이었다.
“병아리는 냄새가 많이 풍화되었지만 토끼 자네에겐 냄새가 담뿍 묻어 남아있소이다. 즉, 자네 둘은 한 인간을 공유했던 것이외다.”
토끼는 벌떡 일어났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아니, 말을 잘못 했네. 우리 셋이 같은 인간을 가족으로 둔 적이 있단 이야기올시다. 내가 제일 먼저 그와 같이 살았고, 그 뒤에 저 불쌍한 병아리 양반, 그리고 토끼 자네로 이어진 것이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