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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2. 2. 23:54 from inly/글
영진이 수정해서 이어집니다. 스페키와 니엔을 만나러 가는 곳에서부터.

공백미포함 3455자



 영진이 간 곳은 도시 중에서도 동남쪽에 위치한 거대한 건물 앞이었다. 날카롭게 빛을 반사하는 미끈하고 날렵한 빌딩 앞에서 영진은 건물을 오른쪽으로 우회했다. 스페키는 뭐가 뭔지 모른 채 그의 뒤를 따랐다.
 둘은 건물의 유리벽 앞에 섰다. 벽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어딘가로 통할 법한 통로와 매끈한 바닥, 그리고 벽이 존재할 뿐이었다. 스페키는 영진을 어리둥절한 얼굴로 쳐다봤다. 출입구라면 저기 있던데, 잘못 찾아온 건 아닐까? 스페키가 의문을 가질 동안 영진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다만 유리벽 앞으로 가 거대한 유리 중 하나를 손으로 밀었을 뿐이었다. 거대한 유리벽은 놀랍게도 소음도 없이 부드럽게 안쪽으로 열렸다. 그러자 건물 안쪽의 모습이 바뀌었다. 스페키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AI 구역은 다 이런가요?”
 벌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묻자 심드렁한 대답이 돌아왔다.
 “AI 구역이라니, 재미있는 명칭이네요. 근본주의자 거주구역을 제외한 나머지를 총칭하는 말인 거죠? 전세계라든가, 근본주의자 거주구역을 제외한 전지구라든가.”
 영진의 말에 스페키는 입을 비죽거렸다. 확실히 자신들이 소수이긴 했으나 그걸 이런 식으로 느끼게 해야 했나. 너무하다. 무례하다. 이런 말이 떠올랐지만 일단 입을 다물고 그를 따라가기로 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유리벽에서 조금 떨어진 구석진 곳에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비상구 마크는 없었지만 비상구와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다만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없었고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금속으로 된 문에서 손을 놓자 자동으로 문이 닫히며 빛이 차단되었다. 계단은 이내 어두컴컴해졌다.
 계단을 내려가자 마찬가지로 어두컴컴하고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역시 빛이 거의 없었고 바닥엔 케이블이 뱀처럼 얽혀 길다랗게 이어져 있었다. 주변엔 온통 직사각형의 물체들이 책꽂이처럼 벽을 지키고 서 있었는데, 스페키는 그게 컴퓨터란 것을 알아봤다. 팬 돌아가는 소음이 낮게 깔리고 작동을 나타내는 불빛이 어지러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컴퓨터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도서관의 책장처럼 진열되어 있었다. 그 컴퓨터들은 중앙으로 가는 길을 만들고 있었는데, 중앙엔 어느 정도 빈공간이 있어서 밝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 빛이 있어 이 공간이 완전히 어둠에 침잠되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둘은 컴퓨터들이 만들어놓은 미로를 따라 중앙을 향해 갔다.
 “안녕, 영진. 오랜만이야.”
 컴퓨터들 사이에서 약간 걸걸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니엔.”
 영진이 인사했다. 둘이 다다른 곳은 컴퓨터들이 공간을 만들어준 곳, 이 곳의 중앙, 빛이 새어나오던 그곳이었다. 거기엔 컴퓨터들과 연결된 12개의 모니터와 스피커, 입력장치, 니엔이라 불린 여자가 앉을 책상과 의자가 있었고, 단촐하게 조금 오래된 듯한 소파와 탁자가 놓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오른편엔 아마 간단한 생활을 하기 위한 집기들이 놓인 작은 천막도 있었다. 뒤로는 또 컴퓨터들이 즐비해 있었다. 그리고 소파와 모니터 사이에 니엔이 서서 그들을 맞았다. 마르고 키가 크고 팔다리가 길쭉한데 어깨는 앞쪽으로 굽었고 눈은 크고 얼굴은 영진보다 몇 살은 어려 보이는 기묘한 인상의 여자였다.
 “여기서 사는 사람이에요? 화장실 볼일은 어떻게 해결한대요?”
 스페키가 영진에게 속삭였지만 영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니엔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가 다시 휘었을 뿐이었다.
 “어서와. 이게 얼마만이지? 연락한 지도 오래 되지 않았어? 어째 마른 것 같아.”
 니엔이 영진을 향해 긴 팔을 벌렸다. 영진은 그 안으로 다가갔고, 자신을 끌어안는 팔에 화답해 어색하게 그의 등을 살짝 안았다. 스페키는 그런 그들을 멀뚱히 바라봤다.
 “이쪽은 누구야? 손님이신가?”
 니엔이란 사람이 드디어 스페키를 가리켰다. 스페키는 익숙하게 미소지었다.
 “아, 이쪽은 스페키에스 씨. 손님은 아니고 그냥... 일행이야. 스페키에스 씨, 이쪽은 니엔이에요.”
 “안녕하세요.”
 스페키가 손을 내밀었다. 니엔은 스페키의 얼굴을 잠시 보다가 손을 잡았다. 그는 미묘한 얼굴을 했다.
 “그래, 오늘 일행까지 데리고 온 이유가 뭐야?”
 니엔이 모니터 앞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며 물었다. 영진과 스페키도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아, 그게... 놀라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영진이 말에 뜸을 들였다. 니엔은 팔짱을 끼고 빨리 말을 하라며 눈빛으로 독촉했다. 영진은 조금 머뭇거리다 말을 꺼냈다.
 “날 방주에 태워줬으면 좋겠어.”
 영진의 말에 스페키는 어깨를 움찔거리며 그를 쳐다봤다. 니엔은 한쪽 눈썹을 올렸다. 말이 한 번에 와 닿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방주라니 무슨 방주 말이야?”
 “출항의 날에 출발하는 방주 말이야. AI들의.”
 영진의 대답이 끝나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할지 니엔도 스페키도 속으로 헤아리고 있었다. AI의 방주라니, 생각지도 못 한 대답이었다. 분명 AI의 종교에 기대겠다고 말은 했지만 이런 것이었을 줄이야.
 “도대체 그게 왜 타고 싶은데?”
 니엔이 물었다. 영진은 잠시 말을 골랐다.
 “방주가 어떤 건지는 알고 있지?”
 당연한 거 아냐. 니엔의 답에 영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래에게 마루를 되살려달라 할 거야.”
 영진의 대답에 니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 기세에 의자가 책상 모서리에 부딪쳐 옆으로 쓰러졌다. 콰당탕 소리가 기둥들에 부딪치며 퍼졌다. 스페키는 놀라서 주먹 하나 크기 만큼 몸을 물리며 가슴에 손을 얹었고 영진은 예상한 듯 꼼짝도 앉고 앉아 엄지손가락을 서로 문질렀다.
 “하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우리 영리했던 영진이가 어쩌다 이런 말을 다 꺼내게 됐을까?”
 니엔이 긴 팔을 어깨 높이로 들었다 내리며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저 그뿐인데도 공기가 새는 음산하고 허스키한 목소리와 큰 키, 마르고 긴 팔 때문에 상당히 위협적으로 보였다.
 영진은 눈썹 한 쪽을 찌푸렸다.
 “「고래는 죽어있던 아담을 하와로 새로 태어나게 하고 세상의 지혜를 줬습니다.」
 이게 말하는 게 성전환이 아니란 건 너도 알고 있잖아. 완전한 소멸과 창조가 아니면 그 ‘지혜’라는 것도 신빙성을 잃어. 기적을 행하는 존재였기에 그들의 종교로서 자리할 수 있었던 거야.”
 “허, 그래서 그게 마루를 되살려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니엔이 비웃었다. 신경질적인 기색이 어려 있었다. 영진도 한숨을 쉬었다. 눈두덩을 비비는 손가락 끝엔 이해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짜증이 서려 있었다.
 “너는 해커잖아. 이게 진짜인지 아닌지 방주에 대한 정보를 이미 가졌던 게 있을 것 아냐. 하다못해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돌아올 수 있는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 찾아온 거야.”
 영진의 말에 니엔은 차분히 의자를 도로 세워 가져와 앉았다. 그는 푹신한 등받이에 거칠게 등을 기대고 이마를 긁적거리곤 발바닥을 까딱거렸다. 그러다 잠시 의자 바퀴를 이용해 왼쪽으로 이동했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턱을 괴고 영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의자를 한 바퀴 빙글 돌렸다. 스페키는 그런 니엔의 행동을 힐끔 보며 영진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지금 날 데리고 헤커한테 온 거예요?”
 “내가 데려온 게 아니라 당신이 날 따라온 거잖아요.”
 그들의 속삭임과 동시에 니엔의 움직임이 멈췄다. 니엔의 시선이 스페키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영진의 소매를 잡고 있던 손가락이 멋쩍게 떨어졌다. 그의 시선은 오싹한 데가 있었다.
 “물론 나는 너보단 많이 알고 있지. 그래서 하는 말이야. 방주에 타려고 하는 건 그만둬. 개죽음이 될 거야.”
 “어떻게 그렇게 단언하는 거야?”
 “왜냐면 내가 해커여서 요 몇 년 간 방주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 했던 애들이 다 죽었단 걸 알고 있기 때문이지!”
  니엔의 말에 영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말에 충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그래도 상관없다’라고 니엔에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문제였다.
 AI가 사람을 죽일 수 있는가? 예전 한 남류작가가 썼던 ‘로봇 3원칙’은 어디까지나 옛날 사람의 인간에 대한 낙관에 불과했다. AI는 필요하다면 인간을 죽일 수 있도록 프로그램 되었다. 인간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적대하는 사람이 죽길 원하는 건 권력을 가진 자건 가지지 않은 자건 똑똑한 자건 멍청한 자건 마찬가지였다. 설사 살해를 하지 못하도록 설계자가 프로그래밍 했었다 하더라도 그의 상사가, 그의 상사의 상사가, 상사의 상사의 상사가, 그 보다 더 위의 사람들이 그 부분을 삭제하도록 했을 것이었다. 물론 인간에 의한 살인이 AI에 의한 살인보다 훨씬, 압도적으로 많이 일어나긴 한다. 그러나 AI는 인간을 죽일 수 있다. 필요하다면 영진을 죽일 수 있다. 스스로도 그걸 알고 있었다.
 “위험하다면 여태까지 알고 있었던 것만이라도 가르쳐주면 안돼?”
 “가르쳐주면 어쩔 건데?”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거 협박이지?”
 “아니, 죽어도 네 이름은 말하지 않을 거야.”
 “역시 협박이잖아!”
 니엔이 책상을 가볍게 내려쳤다.
 “있는도 않은 것에 목숨 걸지 말라고 하는 거야. 내 말 못 알아들어?”
 영진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확신하지? 있는 것도 확인되지 않았지만 없는 것도 확인되지 않았어!”
 “너도 그런 거 없다고 생각해왔잖아? 도대체가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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