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동안 믿어왔던, 그러나 감히 보거나 느낄 수 없었던 존재의 증명이 눈앞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분명 자신에 의해 격발된 이 증명을 그는 믿을 수 없었다. 마치 신의 사자를 창으로 찌른 병사처럼 기적을 행하는 자신의 손을 보았다. 아니, 분명 기적을 행하는 것은 그 손이 아니었다. 그가 단단히 단련한 손을 옆구리 깊숙이 찔러넣어 고통스러워하는 상대방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신이 상대를 선택했다는 증명이자 기적이었다.
“당신이 그런 표정을 하는 건 처음 보네요. 악마를 미워하는 데 겨워 감정도 잃어버린 줄 알았더니.”
고통스러운 숨을 몰아쉬며 말하는 그 눈빛은 형형하게 빛나는 푸른색이었다. 흘러내린 금발의 고수머리가 이마에 들러붙었다.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 아래엔 라틴어를 빽빽히 새긴 문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라틴어는 산산이 부서져 그의 땀에 섞여들어갔다. 땀방울이 흘러내린 자리에 깨끗한 흔적이 남고 검은 땀방울은 바닥과 부딪쳐 강렬한 빛을 발하다가 곧 사라졌다.
검은 수단을 입고 금발 청소년의 옆구리에 수도를 찔러넣은 남자는 그의 애달픈 호흡과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투명한 체액을 황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동양인 혼혈 특유의 어두운 갈색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성흔은 여러 사람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곤 했지만, 이건 잘못된 것이었다. 잘못된 대상이었다. 결코 일어나선 안 되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신은 틀리지 않는다. 그의 안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순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것은 악마가 신의 흉내를 내는 것인가? 아니면 신이 기적을 행하심인가?
남자는 갈비뼈 아래로 찔러넣은 손을 빼냈다. 투명한 체액이 피처럼 쏟아졌고 금발의 아이는 옆구리를 잡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검은 머리의 남자는 소년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했다. 그의 손에 묻은 것이 농도 짙은 성수와 같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왜 악마의 몸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검은 옷을 입은 소년 무리들이 구덩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얼굴 반쪽에 빽빽히 라틴어 문신을 새기고 있었다. 머리는 모두 짧게 잘라 단정하게 넘겼다. 얼굴도 머리색도 키도 체격도 모두 달랐지만 모두 비슷비슷해 보였다. 그들은 침묵하며 침음한 얼굴로 구덩이 안을 바라봤다. 구덩이 안에는 관이 하나 들어있었다.
저쪽에서 수단을 입은 남자 둘이 수레를 끌고 왔다. 거기엔 매끈하게 마감처리된 거대한 십자가가 들어있었다. 옆면엔 세련된 필체로 세긴 글귀들이 적혀 있었고, 정면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소년들 사이에 있던 성인 남자 둘과 수레를 끌고 온 성인 남자 둘이 그 십자가를 들어올렸다. 무거운지 끙 소리가 났다.
그들은 십자가를 관 위에 올려놓았다. 관보다 50cm는 더 큰 십자가였지만 그들은 신경쓰지 않았다. 관의 머리맡에 있던 수단을 입은 남자는 흙을 뿌리면서 라틴어로 무언가를 말했고 나머지 수단을 입은 성인 남자들이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그리고 관 위로 흙이 덮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흙이 쌓이자 남자들은 소년들에게 삽을 쥐어줬고, 소년들이 무덤을 마무리했다. 묘비는 없었다.
파울로스는 그 광경을 무감각하게 바라보았다. 이곳에 온 후로 사람을 묻는 일은 이제 겨우 두 번째였지만 그 전에 그는 숱하게 많은 사람들을 묻어왔었다. 이런 일은 이제 익숙해졌다. 누군가의 죽음에 익숙해지는 사제란 게 윤리적으로 괜찮은 것인가 하는 의문을 품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에게 누군가의 죽음이란 언제나 있어왔던 것이고 앞으로도 항상 있을 예정이었으므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모든 생명은 죽는다라는 당연한 사실과 명제가 수호부처럼 그를 지켜주고 있었다. 다만 신경쓰이는 것이 있을 뿐이었다. 그 신경쓰이는 것은 검은 옷을 입고 금발로 뒤덮인 작은 머리통을 흔들며 자기 동료의 무덤에 흙을 덮는 일에 여념이 없었다. 아직 앳된 티가 나는 선이 고운 얼굴엔 혼란과 울분이 어려 있었다. 수업 시간엔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파울로스는 고개를 돌렸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모래색 건물들이 보였다. 지중해의 따가운 태양이 건물에 부딪쳐 눈을 자극했다. 뒤로 보이는 바다는 더욱 적극적으로 태양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담벼락 아래로 돌렸다. 정갈하게 정돈된 나무들이 눈을 시원하게 해줬다.
이곳은 수도원이자 일종의 학교였다. 교단에서 ‘절대로 세속에 방치해선 안 되는 아이들’을 거둬 키우며 교육시키는 곳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고아원과도 같은 곳이었는데, 일반 고아원과 다른 점이 있다면, 보호자가 없어서 고아원으로 수용이 되는 게 아니라 교단이 적극적으로 아이들을 고아로 만들어 데려온다는 점일 것이었다. 아이들은 인간과 악마의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로 태어났고, 교단은 악마와, 악마와 교접한 용서받을 수 없는 인간을 처리하고 남은 부속물이었다. 인간으로 볼 수도, 악마라고 볼 수도 없었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오거나, 울부짖거나, 자신의 권리를 따지고 들었지만, 곧 이곳에 익숙해졌다. 보수주의자들은 아이들이 주제도 모르는 작은 악마들이라고 했다. 불과 30년 전까지는 아이들까지 모두 죽여왔으니 어떤 의미 운이 좋은 아이들이란 표현도 종종 간부의 입에서 튀어나오기도 했다.
파울로스 본인에게는 그 아이들을 감독하고 가르치는 입장에 있으면서도 그 아이들에 대한 판단은 보류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어떤 때는 인간으로 보였고 어떤 때는 악마로 보였다. 아이들이 악마가 되지 않도록, 악의 길로 접어들지 않도록 엄격하게 지도하는 것만이 길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교단 전체의 입장이기도 했다. 끝없이 금욕과 근면과 인내와 희생을 강요했다. 그들이 탐욕과 나태와 이기심에 들어가는 것은 보통의 사람들과 달리 악마의 기질이 발현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본인들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순수한 인간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음욕을 탐하게 되고 신의 가르침을 배신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존재 자체가 악이었다.
파울로스는 한숨인지 아닌지 모를 것을 내쉬었다. 시선이 가 닿은 담장 아래엔 작은 무덤이 하나 있었다. 고양이의 무덤이었다. 만든 이는 무덤의 흙을 다지고 있는 금발의 소년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다지기가 끝났는지 검은 옷의 소년들은 각자 돌아가기 시작했다. 삼삼오오 돌아가는 모습들 사이에서 요한은 무덤 위에 서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얼굴로 땅을 내려다봤다. 그리고는 고이 덮인 흙 위에 삽을 내리꽂았다. 단호한 행동에 그의 옷자락이 펄럭였다. 긴 속눈썹을 내리깐 깨끗하고 아름다운 그의 반쪽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강단이 어렸다. 파울로스는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요한은 흘끗 마주보고는 등을 돌려 다른 소년들이 간 방향으로 함께 사라졌다.
“자살 사건을 이대로 묻을 수는 없잖습니까! 상부에 알리고 합당한 처리를 해야 합니다. 외부에 알리지 않더라도 적어도 교단 내에서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조치해야죠!”
수단을 입은 한 남자가 말했다.
“상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일이 벌써 두 번째라는 것도요.”
수단을 입은 다른남자가 말했다. 식탁에 둘러앉은 검은 수단을 입은 남자 사제들은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저녁을 넘어 밤의 초입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가 악마의 유혹에 유독 취약하다는 것이 그를 벌해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잊지 마세요, 우리가 돌보고 있는 저 아이들은 악마의 아이들입니다.”
“유혹이라고요? 아이가 유인을 했다면 자살까지 했겠습니까? 이건 명백한 강간사건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자살사건까지 일어난 것이고요!”
“그렇다는 증거가 어디있습니까? 마성이 인간성을 누르고 그를 유혹했다가 나중에 제정신이 돌아온 아이가 자신을 못 견디고 자살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혹은 그저 자신이 순결한 희생자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자살을 했을지도 모르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계속 아이를 두둔하던 사제가 테이블을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주름 하나 없는 그의 이마에 새파란 혈관이 돋아났다. 분노로 꽉 쥔 주먹이 떨렸지만 테이블에 앉은 나머지 사제들은 별다른 미동이 없었다.
“지극히 인간적인 정의감에서 하는 말인 줄은 알고 있습니다만, 형제님, 저 아이들은 악마의 자식들입니다. 보통 인간처럼 생각해선 안된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반백의 중년 사제가 조용히 말했다. 홀로 일어서 있던 사제는 파르르 떨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남은 사제들의 시선이 그 사제의 뒤를 따르다 문이 닫히자 다시 테이블에 둘러앉은 사제 서로의 얼굴로 향했다. 그들은 서로를 둘러본 후 테이블 위로 조용히 가라앉았다.
“형제님은 악마의 유혹에 이끌려 결코 사제가 행해선 안 될 음행을 했으나, 나약한 인간으로서의 행동을 반성하고 있으므로 정상을 참작할 여지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 또한 나약한 인간이니 그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침투하기 쉬운지 알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형제님들은 부디 악마에 홀려 죄를 지어버린 나약한 형제님을 너무 몰아세우지 맙시다. 우리의 근원은 사랑이고 평등입니다. 나약한 인간은 주님 앞에 모두 죄인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인간의 죄를 사하고 악마를 억누르고 주님의 말씀에 따르는 것입니다.”
반백의 사제가 말하자 다른 사제들은 성호를 그었다. 아멘, 기도하는 자의 목소리도 있었다. 모든 것을 관망하듯 바라보던 파울로스는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자는 말을 길게도 하는군.’ 그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얌전히 기도에 동참하듯 눈을 내리깔았다. 그들 사이에서 밉보여 좋을 게 없었다. 그리고 그 역시 똑같은 판단을 내렸을 터였다. 미천한 인간으로서 그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힘들었다. 선조의 지혜에 따라 관례에 따르고 상부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그로서는 실수를 최소화하는 길이자 인간으로서 죄를 최대한 덜 짓는 길이었다. 혹 부조리하단 생각이 들더라도 조직 안에 속한 그가 감히 조직의 판단에 반기를 들어봤자 변화는 없을 것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다. 모든 인간사가 그렇듯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혹은 다수의 뜻대로.
회의를 마친 사제들은 하나둘씩 방을 떠나기 시작했다. 각자 자신의 방으로 향하는 것이리라. 그들은 돌아가서 기도를 하고, 그리고 조금 찜찜한 기분을 곱씹다가 금방 곯아떨어질 것이었다. 늘 그래왔듯이.
파울로스 역시 자신의 방으로 향하려다 내키지 않아 건물 밖으로 나왔다. 쌀쌀한 밤공기가 갑작스레 폐부로 침입해 기침이 났다. 그는 근육질인 체형에 어울리지 않게 잔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오늘 묻은 아이의 무덤을 향해 걸었다. 죄책감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뭔가 가슴을 간질이는 것이 있어 발길을 그곳으로 돌린 것이다.
그곳엔 선객이 있었다. 검은 그림자만 보고도 파울로스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요한이었다. 그는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철제 삽이 흙에 마찰하는 소리가 나고 흙이 뒤로 뿌려지는 소리가 났다. 파울로스는 더 다가가지 않고 요한이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미 상당히 팠는지 허리 아래로는 보이지가 않았다. 옆엔 파낸 흙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혼자서 하려면 힘들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그는 도울 생각도 제지할 생각도 없이 숨죽여 요한을 지켜보았다. 요한은 마치 홀린 듯, 아니, 집념에 사로잡힌 듯 쉬지않고 구멍을 팠다. 허리를 펴거나 땀을 닦는 행동조차도 없었다. 입을 꾹 다물고 그저 삽질을 계속할 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가 되어 허리를 펼 때까지 파울로스는 그를 관찰했다. 구덩이의 깊이가 요한의 키를 넘겼을 때는 심지어 무덤가에 다가가 위에서 노골적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재밌어?”
이윽고 허리를 펴고 한숨 돌린 요한이 묻자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왜 그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반인반마인 소년이 하는 행동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덤 속에서 끙 소리를 내며 요한이 십자가의 한쪽을 들어올렸다. 파울로스로부터 먼 쪽, 관의 발치 부분에서 들었으니 결과적으로 역십자 모양이 되었지만 개의치 않고 구덩이 벽면에 십자가를 세워뒀다. 그는 십자가의 모습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며 요한이 세운 십자가의 끄트머리를 잡았다.
끙차, 소리를 내자 십자가가 끌려 올라왔다. 구덩이에서 올라온 십자가의 흙을 털어 조심스럽게 바닥에 놓자 요한도 가벼운 몸놀림으로 밖으로 올라왔다. 소리가 거의 나지 않는 것이 마치 고양이 같았다.
“......”
올라온 요한이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상대의 도움에 놀랐기 때문이었을 터였다. 다만, 그것만이라고 하기엔 시선이 좀 묘했다. 파울로스는 약간 불편함을 느끼며 구덩이를 내려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