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한 바퀴 돈 기사는 다시 버스 정면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버스의 헤드라이트는 어둠 속으로 끝없이 나아가 사라졌다. 기사는 후들후들 앞으로 나아갔다. 이리저리 손전등을 흔들며 걷는 뒷모습을 버스 안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이 어리둥절한 상황을 기사가 해결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기사가 뭔가를 발견한 듯 어딘가를 비추더니 그곳으로 다가갔다. 뭔가가 들끓는 것이 사람들 눈에도 보였다. 그리고 그것들이 기사의 다리에 들러붙었다. 기사는 뒷걸음질치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고, 곧 그것들이 기사의 전신을 뒤덮었다. 그것들은 마치 날벌레 같았다. 하나하나는 아주 작았고, 기사의 몸에 붙어 웅웅거리며 진동했고 온몸이 빛나고 있었다. 기사는 차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는 마치 도움을 구하듯 손을 내밀고 버스로 다가왔다. 기사의 목에서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비명 소리가 찢어졌다. 버스 안 사람들도 비명을 질렀다.
“닫아! 닫아!”
중년 남자가 소리치자 20대의 덩치 좋은 남자가 재빨리 운전석 옆에 붙은 스틱을 조작했다. 공기 빠지는 소리가 나며 버스문이 닫혔다.
“잠깐만요, 그래도 구해야죠! 열어요!!”
다소 키가 작고 젊은 여자가 외쳤다. “열면 안돼!!”하고 장년의 여성이 외쳤다.
“그... 소화기! 소화기가 있으면!”
젊은 여자가 외쳤다. 영민은 퍼뜩 주변을 둘러봤다. “저기저기!” 노인이 가리켰다. 영민은 차 안에 비치되어 있던 소화기를 꺼내 들고 버스 앞으로 달려갔다.
“안돼! 열면 우리 다 죽어!”
중년의 여성이 그의 허리를 붙잡았다. 닫으라고 외쳤던 중년의 남자도 영민의 가슴을 밀었다. 영민은 그들을 제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젊고 덩치가 좋은 남자가 운전석 옆에서 영민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여차하면 영민을 제압하기 위해 자세를 잡고 있었다. 승모근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영민은 그를 뚫고 나가지 않고 그의 뒤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미 버스 앞까지 거의 도착한 그가 마치 모래가 허물어지듯 입자화 되어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미 머리가 무너져 목 위로는 형체도 없었다. 영민이 무리하게 문을 열고 나간다 해도 그를 구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사람들은 소리 없이 경악하며 그가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사람들은 무겁게 침묵했다. 죄책감과 두려움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 중년 남자가 입을 열었다. 아까 문을 닫으라고 했던 사람이었다.
“이렇게 있어봤자 아무 해결도 안 될 테니 일단 차를 뒤로 뺍시다. 자네가 좀 빼 주게.”
그는 영민을 향해 말했다. 영민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시동이 걸리고 차가 천천히 움직였다. 운전기사가 있던 자리엔 벌레들의 웅덩이가 만들어져 있었다. 버스는 웅덩이에서 점점 멀어졌다. 영민은 차를 세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저기 피해서 앞으로 가야지.”
중년 남자가 왜 일어서냐는 투로 말했다.
“옷은 남아 있어요. 유품이라도 챙겨가야죠.”
대답하는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그가 버스 문을 열자 사람들은 긴장했다. 하지만 버스 안에서는 아무 이로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동안 영민은 버스 밖으로 나왔다.
버스의 헤드라이트에 벌레들의 웅덩이가 보였다. 아까보다는 진정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바닥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벼룩떼 같죠?”
어느 새 뒤따라 나온 아까의 고등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영민이 조금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소년은 오른손에 든 셀카봉을 들어 보였다.
“아까 문 열라고 한 누나가 빌려줬어요.”
영민은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서 셀카봉을 받아 들었다. 둘은 조심스럽게 벌레웅덩이로 다가갔다.
마치 옷에서 사람만 사라진 것처럼 옷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벼룩떼들은 그 사이에서 진동하거나 뛰어오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 안에 가만히 머물러 있었다. 둘은 셀카봉을 최대한 늘려 옷 속으로 그 끝을 집어 넣었다.
이제 됐다 싶어 들어올리자 벌레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벌레들은 조금 웅성거리더니 곧 침착해졌다. 그들은 벌레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셔츠를 꺼내왔다.
영민은 셔츠를 벌레들 위에 슬쩍 털었다. 몇 마리 벌레가 떨어졌고, 문제는 없었다. 그는 셔츠를 옆에 있던 학생에게 건냈다. 학생은 셔츠를 깨끗하게 접어 정리했다.
영민은 바지 버클에도 셀카봉을 넣어 살짝 흔들었다. 그는 신중하게 바지를 끌어올려 흔들었고 벌레들이 우수수 빠져나왔다. 그리고 또다시 바지는 접혔다.
“구두는 포기하자.”
“네.”
그는 몇 번인가 양말과 구두에 셀카봉을 넣어보려 하다가 포기 선언을 했다. 그들은 몸을 일으키고 버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
영민은 걸음을 멈추고 버스 뒤를 노려보았다. 거기엔 익숙한 파란 눈이 있었다. 길고 검은 털은 어둠 속에 녹아들어 경계를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분명 그 개는 예의 그 개였다. 동생의 사고 때 만큼이나 선명한 현실감을 갖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개...!”
영민이 중얼거렸다. 개는 버스 뒤로 돌아 사라졌다. 영민은 버스 뒤편으로 뛰었고 소년이 소리쳤다. “버스 앞쪽이에요!” 영민이 돌아보자 개가 버스 앞을 달려가는 모습이 버스 헤드라이트에 비쳤다. 개는 도저히 영민이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버스에 타!”
영민이 소년에게 소리쳤고 본인도 곧 버스에 탔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냐고 영민에게 물었고, 영민은 개를 따라잡아야 한다는 말만 반복하며 버스에 시동을 걸고 기어를 넣었다. 개는 벌써 저 멀리 달아나고 있었고, 시야에서 놓치기 전에 빨리 따라잡아야만 했다. 저 개가 그들을 이곳으로 끌어들였다. 영민은 그렇게 확신했다.
“억!”
뒤통수에서 둔탁한 소리가 나고 영민은 비명을 지르며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크랙션이 시끄럽게 울렸다. 장년의 여성이 소화기를 들고 있었다. 20대의 젊은 남자는 영민을 운전석에서 끌어냈다. 과정에서 차가 조금 움직이고 비틀거렸지만 크게 자리에서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들은 폭주하는 영민에게서 스스로를 지킨 것이다.
예전, 영민은 한 번도 길을 잃은 적이 없었다. 헤매지 않았고 망설이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 최선의 길을 선택했고, 실패한 적이 없었다. 양친은 그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동생은 그를 동경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형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어린 동생이 그의 손을 잡고 물었다. 시골의 고모할머니 집에 갔을 때였다. 생전 처음 간 곳에서 동생은 망설임 없이 길을 잃은 자신을 향해 똑바로 찾아온 그에게 동생은 물었다. 그는 웃었다. 손가락을 들어 길을 가리켰다.
“저기 까만 강아지 있는 거 보여?”
영민이 묻자 동생은 멀뚱히 손가락 끝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영민은 그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대었다.
“남들한텐 비밀인데, 형한텐 길을 가르쳐주는 검은 개가 있어.”
동생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그럼 내가 길을 잃어버렸을 때 언제라도 찾아줄 수 있는 거야?”
“그래, 그 까만 강아지가 킁킁킁킁, 냄새를 맡아서 우리 정민이가 어디에 있든 찾아낼 거야!”
“우와!”
“그래도 엄마아빠가 걱정하니까 엄마아빠선생님한테 꼭 붙어 다녀야 해.”
“멋있다! 왜 나한테는 그런 거 없어?”
“형한테만 있는 거야. 그리고 꼭 엄마아빠한테 붙어다닌다고 약속! 오늘처럼 막 다니기 없기!”
“엄마한테 말해야지!”
“비밀이라고 했잖아ㅋㅋㅋㅋ 손가락이나 잡아.”
영민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손가락을 감싸쥐는 작은 손은 언제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고 따뜻했다. 둘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시골길은 추석을 맞이하여 황금색으로 물들어가고 마른 흙길이 햇볕을 부드럽게 흩어놓았다. 길 주변의 풀들이 간지럽게 흔들렸다. 이따금 마른 콩이 타닥 부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들은 검은 개의 안내를 받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양친은 둘을 보자 여기 좀 보라고 소리를 지르며 꼭 끌어안았다. 영민은 행복했다. 그를 이끌어주던 검은 개는 그들을 한참을 보다 대문을 넘어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날카로운 충격음이 울렸다. 타이어 마찰하는 소리가 찢어졌다. 아스팔트 위에 쓰러진 동생의 머리 아래로 피가 흘러나와 뭉쳤다. 피웅덩이는 점점 더 커져서 동생의 머리보다도 훨씬 더 크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는 동생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동생은 어둠에 침식당해가고 있었다. 마치 천에 염색물이 들듯이 그렇게 어둠이 커져가, 결국 그림자가 되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영민은 충격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새하얀 병실에 새하얀 이불을 덮은 동생의 그림자가 누워있었다. 양친은 아무 말도 없었다. 시체를 앞에 두고 침묵이 그들 사이를 단절시키고 있었다. 영민은 어깨를 움츠렸다.
“제 잘못이에요. 차가 오는 것을 보면서도 아무것도 못 했어요.”
그가 말했다. 하지만 양친은 아무 말도 없었다. 부정도 긍정도 없이 그저 동생의 손을 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양친의 상처를 들여다 봤다. 그는 그들이 자신을 탓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양친만이 아니었다. 그 자신도 스스로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동생을 구하지 못한 것. 동생이 싸늘한 시체가 되도록 방치한 것, 흔들리는 풀의 간지러움과 얼굴 한가득 머금던 웃음과 자신을 부르던 반가운 목소리를 내팽개친 것은 다름아닌 자신이었다. 동생의 곁을 지키는 양친 뒤에서 그는 고개를 숙였다.
문득 그는 자신의 손에 휴지가 들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병실과 같은 하얀색이었다. 그는 휴지를 풀기 시작했다. 휴지는 발치에 쌓이기 시작하더니 곧 병실 바닥을 가득 채우고 점점 높이 쌓이기 시작했다. 영민은 계속해서 휴지를 풀었다. 계속, 계속, 계속해서 풀었다. 휴지는 마치 꽃처럼 그들 주변을 둘러쌌다. 영민은 휴지를 계속 풀었다. 양친도, 자신도, 병실 전체가 휴지에 매몰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생의 시체만은 선명하게 그대로 남았다. 마치 포장 상자의 충전재에 담긴 상품처럼 동생만이 선명하게 강조되었고, 그는 충전재에 완전히 잠겨가고 있었다.
아무도 그를 구할 수 없었다. 아무도 그를 단죄할 수도 없었다. 그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자신밖에 없었다. 길을 잃어 헤매면서도 영민은 그것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잠에서 깬 영민은 멍하니 버스 천장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눈을 깜박이며 멀리 있던 현실감각을 제자리로 되돌리고 있었다.
반대 차선에서 달리는 차의 헤드라이트가 망막을 찔렀다. 그 바람에 영민은 상체를 일으켰다. 몸을 움직이자 사람들의 쌔근쌔근 잠든 숨소리와 히터의 온기, 피로에 찌든 사람들의 냄새가 밀려들었다. 그는 잠시 주변을 훑어보았다. 버스 내부는 어두웠고, 사람들은 다들 잠들어 있었다. 심야라 고속도로에 차가 없는지 운전석에선 규정속도 위반을 알리는 경고음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버스는 아찔할 정도로 속력을 내고 있었다. 영민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잠이 싹 달아났기 때문이었다.
“안 주무세요?”
통로 건너 옆자리에서 말을 걸어왔다. 아까의 고등학생이었다. 영민은 잠시 망설였다.
“충분히 잔 것 같아서. 너는 안 자?”
학생은 잠시 망설이다가 잠이 오지 않는다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학생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영민은 그가 더이상의 대화를 원치 않는 것인가 싶어 자신도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첫인상도 그랬지만 착실해 보이는 학생이었다. 약간 곱슬기가 있는 머리를 단정하게 정돈하고 이 시간에 착실하게 교복을 입은 것도 그랬다. 교복은 약간 결벽적일 정도로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는데, 앉아 있는 자세 역시 그랬다. 어딘가 긴장된 듯 텐션이 있는 바른 자세였다. 고등학교 2~3학년쯤 되어 보였는데, 그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단정함과 의젓함이 있었다. 현대판 왕자가 있으면 그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의 생각에 어이가 없어 실소했다.
“형은 어디로 가세요?”
더 말을 걸어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영민은 조금 놀라며 대답했다.
“어, 집에 가는 거야. 제사거든.”
“힘드시겠네요. ...누구 제사예요?”
“동생 제사야. 6년 전에 세상을 떴거든.”
“아...”
소년은 애매한 소리를 내며 또 입을 다물었다. 익숙한 반응이었다. 영민은 적당히 말을 만들어낼걸 그랬나 싶었지만 이미 지나간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너는 어디로 가니? 학생이 심야버스 타는 일은 거의 없을 텐데, 혼자야?”
영민이 소년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느닷없이 운전석에서 기사가 비명을 지르며 브레이크를 힘껏 밟았기 때문이었다. 버스 앞엔 가드레일에 앞머리를 박은 승용차가 차선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버스는 계속해서 미끄러졌다. 사고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영민의 머릿속에 승용차가 찌그러지고 탑승자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이 그려졌다. 하지만 그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 처참함에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
버스는 한참을 미끄러졌다. 누군가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를 냈고 누군가는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마침내 버스는 자리에 섰다.
고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라며 뒤에서 승객이 소리쳤다. 그 웅성거림에 영민은 눈을 떴다. 그들은 자동차를 들이받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영민은 자동차의 지근거리까지 버스가 달려들던 것을 보았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창밖을 살펴보았다. 가드레일도 승용차도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었다. 도로도 산도 들도 가로수도 없었다. 오로지 어둠만이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뒤에서 승객이 물었다. 사람들은 다들 창밖을 내다보거나 기사를 쳐다보거나 했다. 기사는 아직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는지 잠시 핸들을 붙잡고 멍하니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명백히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하지만 뒤에 앉아 있던 승객들 중 세 명의 중년이 그를 채근했다.
“네... 잠시... 잠시 어떻게 된 일인지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기사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비치되어 있던 손전등을 꺼내 들며 말했다. 앞문을 열고 버스 밖으로 한 발을 내딛었다. 발바닥으로 단단한 느낌이 전해지자, 그는 책임감을 갖고 버스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버스에는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 다만 버스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었을 뿐이었다. 어둠, 오직 어둠뿐이었다.
검은 개가 거기 있었다. 자정에 가까운 늦은 밤, 편의점을 제외하곤 문을 연 곳도 없는 어두운 길에서 두 눈을 푸르게 빛내며 길 건너편에서 영민을 쳐다보고 있었다. 영민은 개가 반가웠다. 그 길고 검은 털을 만져본 적은 없었지만 예전부터 몇 번이고 만났던 익숙한 개였다. 맥주도 사고 동생도 데려올 참으로 대문을 나선 영민은 길을 건너 개에게 다가갔다. 개는 영민이 길을 건너오자 몸을 돌려 대로변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영민은 홀린 듯 개를 따라 갔다.
기묘한 밤이었다. 건물은 영민에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고, 오렌지색 가로등 불빛엔 미세먼지가 잔뜩 낀 11월의 차가운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길에는 차는커녕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침묵만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을 뿐이었다. 영민은 걸을 때마다 침묵이 다리 사이에 휘감기는 것을 느꼈다.
그 모든 기묘한 것들에도 영민은 불안감을 느끼지 않았다. 개는 모퉁이를 돌았고 영민도 함께 모퉁이를 돌았다. 4차선 도로가 나왔고, 검은 개는 한블럭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오늘은 혹시 털을 만져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개를 따라 갔고, 개는 대로변에서 안쪽으로 꺾이는 골목, 가로등의 공백에서 어둠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영민은 골목 안을 살펴봤지만 개는 사라지고 없었다.
“형!”
골목 밖에서 동생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반가워하는 목소리였다. 영민은 뒤를 돌아 길 건너편의 동생을 봤다. 동생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차피 도로에 자신 이외에 아무도 없음에도 자신이 거기 있음을 알리고 싶어 하는 동작이었다. 그리고 영민의 동생은 도로를 향해 거침없이 발을 내딛었다. 횡단보도가 아님에도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정민아!!”
영민이 그의 이름을 외쳤다. 마치 거짓말처럼 차 한 대가 나타나 그의 동생을 쳤다. 영민은 자리에 멈춰 서서 동생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것을 목격했다. 동생의 몸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 것 같았다. 차는 긴 타이어 자국을 남기며 도로 위에 섰다. 운전자가 다가와 동생의 상태를 살필 때까지 영민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동생에게 다가가서도 멀거니 동생을 내려다 보기만 했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구급차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영민은 소리에 반응하듯 구급차를 쳐다보았다. 오렌지색 옷을 입은 대원들이 동생을 들것에 옮겨 구급차에 태우고 있었다. 영민은 마치 멀리서 바라보듯 그것을 바라보았다. 소리가 왕왕 울리는 것 같았다.
문득 영민은 이유를 알 수 없이 동생이 길을 건너기 전에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큰 개가 있었다. 검은 개, 영민을 이곳으로 이끈 그 크고 검은 개가 파란 눈을 빛내고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개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를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영민의 시선을 알아챈 후 한동안 눈을 마주쳤다. 영민은 그 검은 개에게 유일하게 현실감을 느꼈다. 그 현실감은 희미한 책망이었다. 그러나 개는 마치 조소하듯 그를 홀로 두고 뒤로 돌아 다시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사고 장소에는 다시 영민만이 현실감을 잃은 채 남았다. 환상 같은 구급대원이 그를 일으켜 세워 구급차로 밀어넣을 뿐이었다.
신의 길
11월의 쌀쌀한 바람이 코트 속으로 스며들었다. 영민은 옷깃을 여몄다. 작은 광장을 안은 고속버스 터미널의 불빛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재촉했다.
터미널 안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바깥보다 안은 새것의 매끈함과 차가움이 있었지만 온기가 부족했다. 이 터미널은 발권기와 창구, 탑승공간은 2층에 두고 1층에는 대형 매장을 입점시켰다. 그래서 밤 11시가 넘어가는 이 시간엔 거의 불이 꺼지고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일부 공간에만 불이 켜져 있어 조금 으스스한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목덜미로 한기가 파고들었다. 영민은 어깨를 좁히고 부르르 떨었다. 시커먼 에스컬레이터가 입을 벌리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층 위로 올라가자 2층의 밝은 조명과 무인발권기가 그를 맞았다. 그는 야근으로 지친 어깨를 들어 겨우 발권기의 버튼을 눌렀다.
결제를 위해 영민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는 동안 옆자리에 한 청년이 와 섰다. 청년은 빠른 속도로 버튼을 눌러 순식간에 표를 구입했다. 발권기는 표를 끊임없이 토해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저 손이 빠른 청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던 영민은 놀라서 그의 얼굴을 힐끔 훔쳐보았다. 그는 숱이 많고 약간 긴 곱슬머리에 갸름한 얼굴, 짙고 모양새 좋은 눈썹에 짙은 쌍꺼풀이 진 커다란 눈에 오뚝한 코, 조금 도톰한 입술을 하고 있었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과 갈색의 눈동자까지, 얼굴엔 동남아인의 특징이 뚜렷이 나타나 있었다. 영민은 이유도 없이 당황해서 자신의 발권기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마 일행들이 밖에 있나보지. 이 날씨에? 아니, 먼저 와서 표를 사고 있나보지. 불시에 자신 안의 인종차별과 조우한 그는 조금 부끄러워하며 다시 발권기를 조작했다. 그가 옆자리 청년에게 놀라는 사이 발권기가 초기 화면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이젠 좀 편안한 마음으로 자리 선택으로 들어가 보자 아까는 거의 비어 있던 좌석의 자리가 전부 나간 것이 보였다. 조금 전에 자신이 선택했던 자리만이 남아 있었다. 결제 과정만 남아서 그가 선택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마침 빈자리가 일행의 숫자와 딱 맞아 떨어졌다니, 기막힌 행운이었다. 영민은 자신의 표를 받으며 그 운으로 로또를 하면 대박 터졌을 텐데 하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단 한 번도 되돌아가는 과정 없이 정확히 버스의 남은 좌석 수를 선택하여 자리를 선택하고 표를 받아갈 수 있다니, 천운이 따르는 사람인 듯했다.
영민은 표를 잡고 몸을 돌렸다. 문득 손 언저리에서 털이 살랑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자 검은 개가 옆에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영민은 흠칫했다. 개는 영민을 스쳐 지나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걸어갔다. 개는 아까의 청년 옆을 스쳐 지나 좌석 끄트머리에 교복을 입고 앉은 남고생 앞에 서성거렸다. 영민은 홀린 듯 개를 향해 걸어갔다. 개는 남고생의 커다랗고 무거워 보이는 은색 트렁크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더니 남고생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남고생은 개가 보이지 않는 듯 미동도 없이 정면을 보고 앉아 있었다. 개는 몇 번이나 겅중거리며 학생의 무릎에 앞발을 올리고 냄새를 맡다가 다가오는 영민을 돌아보더니 스르르 사라졌다.
영민은 학생의 자리에서 두 자리 건너 자리에 앉았다. 학생은 하얗고 예쁘장한 얼굴에 긴 팔다리를 하고 있었다. 영민은 그에게서 동생의 그림자를 찾았다. 그의 동생도 그렇게 하얀 얼굴에 긴 팔다리를 하고 아직 성장기인 소년 특유의 조금 불안정하고 신경질적인 선을 하고 있었다. 방학이 되어 고향에 갈 때마다 웃으며 반겨주던 예쁜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는 얼굴을 감쌌다. 자괴감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소년과 외국인 사이에서 괴로워했다.
11시 50분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매진된 버스 치고는 사람이 적었다. 버스표를 잔뜩 사던 외국인은 줄의 맨앞에 서서 차표를 보이고 있었다. 영민은 줄을 서서 주변을 살폈다. 주변에 일행으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소년이 버스의 옆구리에 트렁크를 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꽤나 묵직한지 혼자서는 애를 먹고 있었다. 영민은 그의 곁으로 가 트렁크의 한쪽을 들었다. 소년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는 트렁크를 안으로 밀어넣었다.
“감사합니다.”
“아니...”
꾸벅 고개를 숙이는 소년에게 그는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당연한 거야.”
그는 그렇게 대답하곤 버스에 올라 탔다.
버스 안에는 약 열 명가량 되는 사람들이 타 있었다. 뒤쪽 자리엔 예의 외국인이 자리를 뒤로 최대한 밀고 누워 있었다. 영민은 구입한 일인석에 앉아 좌석을 조절했다.
의자를 통해 온몸으로 버스 엔진의 진동이 느껴졌다. 이렇게 앉아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10시가 넘도록 야근을 했단 사실이 떠올랐다. 내일이 동생의 기일이었고 모레는 주말이었다. 금요일의 일까지 다 해치우려다 보니 생각보다도 힘든 하루가 되었다. 몸에서 힘을 빼자 참을 수 없는 졸음이 몰려 왔다. 정신은 군데군데 점점이 끊겼다가 까무룩 잠의 세계로 빠져들었다.